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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부성과 완산지역

제2부 전주부성과 완산 지역

전주부성 지역

전라감영로 이미지

1) 전라감영로
- 기점 다가동 2가 123
- 종점 전동 126

전라감영로는 완산교에서 구 전라북도 청사 앞을 지나 팔달로와 만나는 지점까지의 도로이다. 이곳에 전라감영로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은 구 전라북도 청사가 조선시대 전라감영 터이었기 때문이며, 전라감영의 위상을 재정립함으로써 전주의 이미지를 재고하는 데서 도로명 부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전라감영은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라남북도 총 56개 군현을 통괄하였으며 서울, 평양에 이어 조선 제3대 관청으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전라감영은 전주성내에 동문에서 서문에 이르는 길과 남문에서 객사에 이르는 T자 형 길을 기준으로 남서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그 동쪽 맞은편으로는 전주관아가 있었다. 전주성 축성에 대한 가장 확실한 연대는 1734년(영조 10년)의 일이지만 도시로서 전주의 역사는 천 년이 넘는 것을 감안한다면 전주성의 축성은 이미 고려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떻든 1734년 전주성이 너무 오래 되어 퇴락한 것을 전라감사 조현명이 확장 개축하였으며 그 30년 후인 1767년(영조 43년)에 전주에 큰 불이 나서 민가 천여 호를 태우고 문루도 모두 불에 타, 그 해 9월 전라감사 홍낙인(洪樂仁)이 남문과 서문을 복구하고 각각 풍남문(豊南門)과 패서문(沛西門)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전라감영은 18세기에 이르러 정청(政廳) 선화당(宣化堂)을 비롯, 감사의 처소인 연신당(燕申堂), 감사 부친의 처소인 관풍각(觀豊閣), 감사의 가족 처소인 내아(內衙), 예방비장(禮房裨將)의 집무소인 응청당(凝淸堂), 6방 비장의 사무소인 비장청(裨將廳), 감사의 잔심부름을 맡아 하는 통인청(通人廳), 하부 실무자들이 일하는 곳인 작청(作廳), 정문 포정루(布政樓) 등 25개의 시설물을 갖추고 있었다.

1894년 4월 27일에는 장사꾼으로 위장한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이 용머리고개에서 대포와 총을 쏘며 서문과 남문으로 진입 전주성을 점령한 바 있으며,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은 완산칠봉에 진을 치고 전주부성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감행함으로써 전주부성의 성벽이 크게 훼손되는 시련의 역사가 담겨 있기도 하다. 그 후 일제 강점에 따른 국권침탈 이후 선화당을 중심으로 한 전라감영의 건물들이 일제의 청사로 쓰이면서 감영과 부영의 여러 건물들이 철거되었고 1943년에는 선화당, 작청, 진휼청, 통인청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1951년 당시 경찰서 무기고에서 폭발이 일어나 선화당을 비롯한 부속건물마저 불에 타버리고 선화당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회화나무만 남게 된다. 그 이듬해 그곳에 전라북도 청사가 들어섰고 의회 및 전라북도 경찰청 건물 등이 차례로 들어서게 된다. 전라북도 청사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됨에 따라 이 건물은 전라북도기념물 제107호로 지정(2000년 9월 8일)되어 현재에 이른다.

한편 전라감영로의 동편 맞은편에는 전주부를 관장하는 전주부영이 있었다. 전주부영에는 판관의 집무처인 동헌, 동헌 서편에 판관 가족들의 거처인 내아, 내아 앞뒤로는 판관의 휴식처인 득월당(得月堂)과 영회 장소 의의정(猗猗停), 내아 뒤로 사당(祠堂), 기생들에게 가무음곡을 가르치던 교방(敎坊), 재인을 관장하는 장악청(掌樂廳) 등이 있었다.

2) 충경로
- 기점 : 다가동 3가 82-1(백합주단)
- 종점 : 경원동 3가 93-19(금성화원)

충경로는 다가교에서 객사, 풍년제과, 동부시장 사거리를 지나 기린대로와 만나는 지점에 이르는 길이다. 충경로라는 이름은 충경공 이정란 장군을 기념하기 위한 데서 유래한다. 기록에 따르면, 충경공(1529년-1600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68년(선조 1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군이 이치(梨峙)를 넘어 전주성을 공략하려 했으나, 충경공이 전주성의 군율을 엄히 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자 전주성 공격을 포기했다고 한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이 전주성을 포위했을 때 전주성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가 성을 버리고 도망하자 충경공이 전주부윤이 되어 전주성을 다시 지켜냈다고 한다.

충경로가 개설되기 전까지 전주성 서문과 동문을 잇는 도로가 전주 도심을 동서로 가르는 가장 큰 도로였는데 충경로가 개설되면서 충경로는 팔달로와 더불어 전주 도심의 중심도로로서 기능해 왔다. 충경로에는 전주객사가 있는데,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외국 사신의 숙소로 이용되어 관사 혹은 객관이라고도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초하루와 보름에 이곳에서 궁궐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올리기도 하였다. 전주객사는 전주성 안에서 가장 큰 건물로 중앙에 주관이 있고, 좌우에 동· 서 익헌이 있는데 이곳은 외부에서 오는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었으며, 객사 앞으로 내삼문 양 옆으로 맹청, 무신사, 중삼문 옆으로 아영청, 공청 등의 건물이 있었으며 주관 앞면에는‘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편액을 걸어 이곳이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표명하였다.

3) 팔달로
- 기점 : 금암동 454-1
- 종점 : 서서학동 288-5

팔달로는 공수내다리 부근에서 싸전다리를 지나 충경로 사거리, 코아호텔, 금암광장까지의 도로를 말한다. 팔달로는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연결되던 국도 제1번 도로의 일부이다. 1929년 철도 개설 및 전주역 이전(구 전매청 자리에서 현 전주시청으로) 이후 도심과의 연계를 위해 구 전주역에서 북문오거리까지 22m 광로가 개설된다. 이 도로는 통칭 역전통이라 불리는데 이 역전통과 같은 크기의 광로가 오거리에서 옛 중앙초등학교 앞까지 개설된다. 당시 이 도로는 ‘12칸 도로’라고 불렸는데 ‘12칸 도로’란 집을 지을 때 기둥과 기둥 사이를 한 칸으로 쳤을 때 12칸에 해당하는 넓이를 지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도로는 1945년에 북쪽으로는 구 중앙초등학교 앞에서 전주교까지, 남쪽으로는 구 전주역 앞 오거리에서 분수대까지 확장되어 모름지기 전주의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가장 중요한 도로가 된다. 팔달로란 이름은 원도연(2004; 222-223)에 따르면 1967년 10월 19일 도로이름 공모전을 통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을 얻게 된 경위를 보도한 전북일보 1967년 10월 19일자를 인용한다.

전주시는 19일 시청앞 중앙간선도로를 팔달로로 명명 발표했다. 두 차례에 걸쳐 도로명을 공모, 80명에 1백45건의 응모로 2명이 당선됐다. 당선자는 다음과 같다. 한병희(전주시 다가동 4가 18), 이동명(전주시 동완산동 48).

팔달로 명명 연유 : 옛날 전라감영 동편 입구 정문을 팔달문이라 했다. 팔달문 누상에는 신문고가 있어 도민의 진정 건의를 창달하는 문화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고전도시이며 문화도시인 전주가 생산도시로 전환한 새 면모를 갖추는 의미로 4통8달을 뜻하여 팔달로로 명한 것이다.

전주 근대화의 근간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그래서 전주시민에게 팔달로는 남다른 회억을 남긴 도로이다. 한자식 표현들이 대부분 그렇듯 팔달로는 다른 도시 수원과 대구 등지에도 있는 도로명이며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어떻든 전주 팔달로와 관련된 재미있는 칼럼 하나를 소개한다.

1980년 봄 우리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팔달로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민주화와 군부독재타도를 외쳤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블랙박스라 불리던 장갑차 형태의 페퍼포그차에서 뿜어대는 지랄탄과, 발사용 총기에서 발사하는 사과탄, 그리고 전경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피와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우리에겐 화염병이 없었다. 아니, 뒷날 꽃병이라 불리던 화염병을 우리는 아직 몰랐다. 하긴 운동권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팔달로에서 경찰이 페퍼포그와 최루탄을 쏘아대면 학생들은 보도블럭을 주먹만하게 깨트려 던지는 것으로 맞대응을 했다. 개중에 용감무쌍한 학생들은 경찰이 쏜 최루탄이 아직 분사되기 전에 주어서 되던지기도 했다. 전북대 교양과정부 잔디밭에서 시작된 시위대는 종합경기장을 지나 금암로터리를 지나 서중로터리를 지나 중앙시장을 지나 전주역이나 도청에 이르기까지 여러 군데에서 난관을 격어야만 했다.

참 넓었던 ‘12칸도로’ 팔달로는 전주의 상징이었다. 팔달로는 1929년 정규철도가 개설되고 지금의 전매청 자리에 있던 전주역이 지금의 시청 자리로 이전됨에 따라 전주 최초의 광로(노폭 25m)로 개설되었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니 팔달로 개설 당시의 상황을 내가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짐작컨대 팔달로는 전주의 첫 번째 신작로였을 것이다. 사학자인 최근무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팔달로는 자갈길이었다. 드문드문 다니던 차와 우마차들이 자갈길을 오가면 길이 패이게 되는데, 처음에는 나라에서 1년에 한 번씩 자갈을 가져다가 채워 넣고 다져주는 작업을 해주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집집마다 자갈을 채워 넣는 작업을 할당도 했다고 하니 팔달로는 때로 전주에 사는 서민들의 애물단지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팔달로는 지금도 대중교통의 근간이 되는 도로인데, 5.16까지만 해도 시내버스가 없었다고 한다. 전주의 첫 시내버스는 전북대학교 기성회에서 도입해서 운행한 것이 효시였는데, 당시만 해도 “좁디좁은 전주에 무슨 놈의 시내버스가 필요하냐”고 소리를 높인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긴 팔달로를 개설할 때 전주에 그렇게 큰 도로가 왜 필요하냐면서 혀를 끌끌 찼다고 하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내 어릴 적, 그러니까 1970년대까지만 해도 팔달로는 ‘12칸도로’라고 불렸다. ‘12칸도로’에서 ‘칸’은 집을 지으면서 세운 기둥과 기둥 사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한 칸은 대략 2m 안팎이라 할 수 있고, 노폭 25m 도로는 12칸도로라고 불러도 무방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임금의 침소였던 경복궁의 강연전이 11칸이었고,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시대에 황제의 즉위식 등 국가의 대행사가 열렸던 자금성의 태화전이 11칸이었으니, 12칸도로는 ‘참 넓은 도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팔달로라는 명칭은 구 전북도청 자리에 있던 팔달루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아마도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는 한자 숙어에서 따온 이름이었을 것이다. 팔달은 길이 팔방(八方)으로 통하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팔달로는 목포에서 신의주로 이어지는 1번 국도에 위치해 있어서 아직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전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서울을 다닐 때면 지나는 중요한 길목이었고, 고속도로가 건설된 이후에도 전주와 완주 무주 진안 장수 임실 순창 남원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마다 지나야만 하는 도로였다.

길은 길에 연하여 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사람도 늘고, 차량도 늘어나서 팔달로는 이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100만 광역도시를 꿈꾸는 전주이기에 도로도 많이 늘어났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팔달로 외에도 충경로와 백제로를 비롯해서 동부우회도로와 서부우회도로, 대학로, 아중로, 진북로, 남북로 등 많은 지선도로들이 개설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도로를 만들었어도 팔달로의 교통체증은 일상화되었고, 거의 모든 사거리마다 설치되어 있는 신호등은 오히려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문명의 이기로 전락했다.

과연 전주의 교통문제를, 도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 것일까. 도시계획 문외한의 생각으로도 서부신시가지가 형성되기 전에 최소한 동서로 가로지르는 신작로 하나쯤 뚫리거나, 기존의 도로를 8차선 정도로 확장해야 마땅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과문의 소치인지 나는 아직 새로운 도로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엄청난 도로개설비용이 문제라는 것을 짐작 못하는바 아니지만, 누군가 익산과 새만금을 잇는 자기부상열차를 유치할 수 있는 열정과 능력을 지녔다면 전주의 도로문제 해법쯤 내놓지 못할 바가 아닐 것이다.

팔달로를 사통팔달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팔달로가 제 이름이 지닌 뜻대로 구실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 있도록, 길이 길에 연하여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도록 말이다.

[출처] 이름 구실 못하는 팔달로 /정상권 두인기획 대표 <새전북신문 2006년 1월 29일 자>

4) 대동로
- 기점 : 태평동 107-37(유창ENG)
- 종점 : 서노송동 616-38

대동로는 도토리골교 앞에서 전주초등학교, 신협 365, 수협은행전주지점을 지나 전주시청 앞 광장에 이르는 길이다. 대동은 조선시대 부서면 4계 지역으로, 일제 강점기 본정 4정목, 해방 직후 1946년에 대동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1957년 행정구역 개편에서 대동은 다가동 4가로 명명되다 1973년에 다가동으로 편입된 지역이다. 따라서 대동로란 명칭은 해방 직후의 행정명칭을 도로명으로 이용한 것이며 대동은 대동로의 기점 지역에 해당한다.

5) 문화광장로
- 기점 : 고사동 7-1
- 종점 : 서노송동 616-8

문화광장로는 북문오거리에서 현 전주시청 앞 광장까지의 도로를 말한다. 문화광장로는 제3기 시구개정에 이은 제4단계 사업(1934-1937년)과 더불어 이루어진 전주역사에서 북문 사거리까지 개설된 도로이다. 김현숙(2004: 167)에 따르면 이 도로는 1929년 전주역사가 고사동에서 노송동(지금의 시청사)으로 이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전부근이 활성화되지 못하자 중심 시가지와의 원활한 연계를 통해 인근 지역의 발달을 도모하기 위해 분문에서 역에 이르는 368m의 도로를 폭원 22m로 개설·포장하였다. 이곳은 당시‘역전통’이라 불리며 새로운 상권을 형성하게 된다.‘역전통’은 전주역사가 현재의 역사로 이전되기 전까지 전주 관문이며 가장 활발한 상권을 형성해 온 지역이다.

전주부성의 북문 앞은 오랫동안 오거리로 불렸다. 이는 북문 앞 사거리에 북문에서 전주역으로 가는 길이 동북향으로 뚫려 있어서 오거리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전주역 가는 길과 북문에서 직각으로 난 팔달로 가는 길 사이가 삼각지를 형성하는데 줄곧 오거리 광장으로 불리다가 최근‘문화광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최근 이곳은 정치적 현안이 있을 때마다 시민들이 모이는 공간이 되어 문화 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을 지니기 시작하였다. 문화광장로라는 도로명 역시 이곳 문화광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제 강점기 ‘역전통’으로 시작되어 문화의 세기에‘문화광장로’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세월의 흐름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문화광장로’로의 명명은 그런 점에서 20세기 초의‘역전통’에 함의된 근대화의 현장으로서의 의미에서 21세기 초 시민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소통하는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참여의 장으로서 거듭난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6) 공북로
- 기점 : 진북동 1046-1
- 종점 : 서노송동 649-3

공북로는 어은교에서 진북초등학교, 숲정이성지를 지나 팔달로에 이르는 길이다. 공북로라는 도로명은 전주부성의 북문 누각의 이름으로부터 비롯된다. 전주부성은 고려말에 관찰사 최유경(崔有慶)이 쌓고 사방에 문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정유재란 때 모두 불 타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주성 축성에 대한 가장 분명한 기록은 1734년(영조 10년) 전라감사 조현명(趙顯命)이 크게 개축하여 4대문을 세웠다는 것이다. 조현명은 동고산성과 황방산에서 석재를 가져다 성벽을 크게 고쳤다. 당시 동문은 판동문(判東門), 서문은 상서문(相西門) 남문은 명견루(明見樓), 북문은 중거문(中車門)이라 하였다. 그러나 1767년(영조 43년)에 전주에 큰 불이 나서 민가 천여 호를 태우고 남문과 서문도 소실되었다. 그해 9월 전라감사 홍낙인(洪樂仁)은 남문과 서문을 복구하고 남문은 풍남문(豊南門)과 서문은 패서문(沛西門)으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1775년(영조 51년)에 관찰사 서호수(徐浩修)는 북문과 동문을 중건하고 각각 공북문루(拱北門樓)와 완동문루(完東門樓)로 개칭하였다. 1907년 전주부성 성벽 철폐로 성벽과 동, 서, 북문이 모두 헐리고 현재는 남문만 남아있다. 공북로는 1775년 서호수가 중건한 후 북문에 붙인 공북문루의 공북에서 비롯된 도로명으로 전주부성의 북문으로 통하는 옛길을 기념하고 있다.

7) 벚꽃로(길)
- 기점 : 진북동 1152-4
- 종점 : 진북동 417-58

벚꽃로(길)는 덕진구청 주변의 도로를 말한다. 덕진구청에서 해마다 벚꽃축제를 열어 인근 주민들과 더불어 벚꽃의 아름다움을 향유하고 있으며 벚꽃로는 이를 기념하여 명명된 도로명이다. 사실상 벚꽃길은 이곳뿐만 아니라 전주의 곳곳에서 아름다운 벚꽃길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도로 이름을 듣고 도로를 떠올릴 때 이 지역을 바로 떠올리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인근 주민들 사이에 이곳을 벚꽃길로 부르는 경향이 생길 정도로 벚꽃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기대하는 추세에 있는 데다가 작금에 벚꽃축제를 열어 그 기대에 부응하는 행사가 개최되고 있어서 점차 벚꽃로(길)로의 위상을 갖추어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는 점에서 벚꽃로(길)의 명명은 소망이 있는 도로명이다.

8) 풍남문길

풍남동과 전동은 전주의 구도심을 대표하는 행정명칭이다. 풍남동은 전주성 남문의 이름인 풍남문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전동은 태조의 어진이 모셔져 있는 경기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풍남문은 행정구역상 전동에 있고 경기전은 행정구역상 풍남동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풍남동에는 풍남문이 없고 전동에는 경기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경기전과 풍남문은 전주가 조선 건국조의 고향이며 조선 3대 도시의 하나였으며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 전체의 행정 수도로서의 상징물을 대표하는 유적임에 틀림없으며 행정구역에 상관없이 전주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풍남문길은 옛 전주부성의 상징인 풍남문을 도로명으로 부여하였다. 풍남문은 보물 제 308호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1734)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다. 이후‘영조43년 3월 성안에 불이 일어나 남문과 서문이 전소되었는데, 같은 해 9월에 부임한 관찰사 홍낙인이 두 문을 중수하고 이곳이 이태조 발상지라 하여 한고조의 고향인 풍패(豊沛)의 이름을 따서 남문을 풍남문(豊南門) 서문을 패서문(沛西門)이라 하였다. 풍남문에는 편액이 3개 있는데 풍남문 남쪽에는 서자가 밝혀지지 않은 풍남문 편액이 있고, 북쪽에는 전라관찰사 서기순이 쓴 호남제일성, 그리고 2층 누각에는 명견루 편액과 명견루 중수기가 전하고 있다.

전주성은, 동북쪽으로는 승암산에서 시작하여 기린봉, 인봉리 뒷산, 반태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남서쪽으로는 고덕산 자락에서 시작되어 남고산, 완산, 유연대 자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좌우로 길게 옹위하며 형성한 평지에 전주천을 남서로 에둘러 들어서 있어서, 기린, 학, 용 등의 상서로운 동물들의 보호를 받으며 전라도 전역을 관장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조선의 국운이 기울고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하면서 전주성은 1907년에 성벽과 서문, 북문, 동문이 모두 해체되고 오직 풍남문만 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침과 변화가 역사의 본질이어서 영화롭던 과거가 현재까지 지속되기를 소망하는 것은 과욕일 수 있으나 문화의 세기에 들어 전주가 전통문화의 중심 도시로 성장 발전하면서 풍남문의 가치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해갈 것이다.

풍남문은 현재 남문 시장 부근에 위치해 있는데 이는 전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풍성했던 남문장이 지금도 전주의 가장 큰 전통시장으로 유지되고 있어서 그 역사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조선시대 후기 장시의 공간은 경제적 중심으로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종합 사회 공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풍남문을 중심으로 한 남문밖시장의 역사성은 다시금 조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9) 전주객사길

전주객사길은 전라도의 상징인 전주객사의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전주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 객관이었다. 이곳에서는 고려 전기부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를 갖기도 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망궐례를 올리기도 하였다. 주객사는 중앙에 주관이 있고 좌우에 동서 익헌과 맹청, 무신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새로 보수한 주관과 서익헌이 있고 새로 중수한 동익헌을 볼 수 있다. 주관 앞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쓴 풍패지관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풍패라는 말은 한고조의 고향을 의미하는 뜻으로 이곳 전주가 태조 이성계의 고향을 나타내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1937년 전라북도 교육참고관이 되고, 해방 후에는 전북대학교 전신인 명륜대학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현재 전주객사는 전주 구도심의 상징이며 교육의 현장인 동시에 만남의 장으로 애용되고 있다.

10) 현무길

현무길은, 조선 정조 20년(1796년) 판관 윤광수(尹光垂)가 진북정(鎭北亭) 북편 100보 주위에 못을 만들어 북방 수호의 의미로 현무지(玄武池)를 조성한 것을 기념한 것이다. 예로부터 현무는 북쪽 방향과 그 수호신을 나타낼 때 사용해 왔으며, 북쪽 방위의 물 기운을 맡은 태음신을 상징하는 짐승으로 거북이의 등과 뱀의 목이 뭉친 형상으로서 계절로는 겨울을 의미한다. 현무는 동방의 청룡, 남방의 주작, 서방의 백호와 함께 4신의 하나로, 북방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현(玄)이라고 하고, 몸에 비늘과 두꺼운 껍질이 있으므로 무(武)라고 했다. 고구려 벽화에서 현무가 북방 수호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전주의 현무지 역시 전주성의 북방 수호를 소망한 소치다.

11) 물레방아길

이전 시기에 전주천 물길은 도토리골 바로 위 석보에서 동북 방향 지금의 태평동 방향으로 흘러 내리는 물길이 있었다. 이 물은 전주부성의 북쪽에 형성된 장잿들에 농수로 사용되었다. 이 물길 주변 즉 전주천 도토리골 바로 위 석보에서부터 동국해성아파트 너머의 금암천 사이에 물방아골, 혹은 물레방아골이 있었다. 이곳 물레방아는 두 개가 나란히 있어 쌍물방아골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석보에서 흐르는 물은 도랑을 타고 비석거리, 물방아골을 지나 현 동국해성아파트를 관통하여 진북동의 숲정이 마을을 거쳐 금암천으로 합수되었다고 한다. 물레방아길은 이전 시기의 물길과 장잿들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사람들의 삶이 담긴 도로 이름이다.

12) 태평길

태평동은 본래 전주군 부북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3리, 4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상생리라 해서 이동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 전주읍에 편입 상생정이라 부르다가 1946년 동명 변경에 의하여 정을 동으로 고치는 동시에 근심과 걱정이 없는 동네를 만들자고 하는 뜻에서 태평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평동 전 전매청(현 전주태평 SK뷰) 동쪽에 경편철도가 놓였다. 경편철도는 전주 이리 간을 운행하는 철도로 1914년 11월부터 1927년 까지 약 13년 동안 협궤철도였다. 이곳 전주역 주변에는 공구상과 철물점 등이 있었으며 그 인근에 중앙시장과 전주초등학교, 동양잠사 등이 있었다.

13) 노송광장로
- 기점 : 서노송동568-1(전주시청)
- 종점 : 서노송동649-5(효사랑병원)

노송광장로가 시작되는 전주시청 앞으로는 노송천이 흐르고 있었다. 노송광장이란 이름은 노송천과 더불어 전주시청 앞 푸른 광장에 심어놓은 노송과도 연관되어 있다. 노송광장은 협궤 경편철도가 전라선에 합류됨으로써 전주역사를 이전 구 전주역 광장으로 사용되던 자리였다. 도심의 확장과 교통량 증가로 말미암아 전주 동북부 지역으로의 도심 확장에 장애가 되던 전라선과 전주역을 전주의 동부 외각 지역으로 옮김에 따라 구 전주역사는 현재의 전주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고 그 자리에 전주시청이 들어섰다. 전라선이 지나던 자리는 현재 기린대로가 되었고 기린대로의 전주시청 주변에는 크고 작은 빌딩들이 들어서면서 모름지기 전주의 중심 빌딩가로 변모되었다. 노송광장길에는 전주시청 광장에서 구 철길을 따라 코아호텔, 풍남맨션아파트, 효사랑병원 등이 있다.

14) 노송여울길

노송여울길은 노송천의 물길이 여울져 세차게 흐르는 지점을 의미한다. 이곳의 물길은 동고산성 성황사 앞에서 발원한 노송천이 낙수정과 간납대, 관선교를 지나 그 세를 불리다가, 전주고등학교 정문 앞 부근에서 기린봉에서 흘러내린 물과 합류하며 그 세를 더하게 된다. 노송여울길의 대부분은 현재 복개되어 그 위로 도로가 형성되어 있다.

15) 진북로(길)
- 기점 : 진북동1028-7
- 종점 : 진북동1024-19

전주의 옛 이름은 완산이다. 전주는 산세로 보면 완산이요 물길로 보면 전주이다. 완산은 휘몰아치는 바람조차 완산에 와서는 잠잠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주의 물길은 임실 슬치에서 발원한 전주천이 승암산과 고덕산 사이로 북서진하며 전주의 남천을 형성하며 남고산성에서 흘러내린 남고천, 흑석골에서 공수내를 거쳐 들어오는 물길 등을 합하여 서천을 형성하다가 기린봉 자락에서 흘러내려 작은 모래내 큰모래내의 물이 합류되어 전주의 북서부 지역으로 빠져 나간다. 전주의 북서부 지역은 전주천이 흐르는 관계로 겨울에 불어오는 북서풍을 막을 수 없자, 풍수지리학적으로 고견이 있는 전라관찰사 이서구가 북쪽의 허기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이 바로 숲정이다. 그리고 숲정이 부근은 북으로 빠져나가는 기운을 눌러준다는 의미로 진북(鎭北)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진북로는 풍수상 전주의 기맥이 빠져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선조들의 소망이 깃든 도로 이름이라 하겠다.

16) 숲정이로(길)
- 기점 : 진북동 1157-3
- 종점 :진북동 434-43

조선 영조 때 전라관찰사 이서구는 전주 북방의 허한 풍수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지금의 진북동 숲정이 성당 부근에 숲을 조성하였으며 숲정이는 바로 이곳을 말한다. 한국지명총람 전북편에 숲정이는 장령 이후선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정자를 짓고 숲정이에 있으면서 죽수정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전 시기에 숲정이는 아주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이었으며 주로 대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기타 잡목의 숲이 많아 숲정이를 수리(籔里), 수마을이라고도 불렸다. 조선 후기에 가톨릭 교도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전주천변의 초록바위와 더불어 이곳 숲정이에서도 순교자들을 처형하게 되는데, 그 후 숲정이는 풍수적 의미보다 순교지로서 더 많은 명망을 얻게 된다. 이곳에는 천주교도순교비가 세워져 있으며 숲정이성당이 있다.

한옥마을 지역

한옥마을 지역 이미지

전주가 천년 고도이고 조선 건국조의 본향이라는 역사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곳을 들라고 한다면 역시 한옥마을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주변에는 조선 비조와 관련된 유적들이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경기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옥 밀집 지역이 자아내는 한옥의 전통미와 고즈넉한 분위기는 문화의 세기에 들어 그 가치를 새로이 조명 받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이곳은 전주를 대표하는 명소로 거듭나게 되었다. 전주의 근대화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경제적 침탈 과정과 더불어 이해될 수 있는데 일제가 1907년 전주 남문에서 서문을 거쳐 북문에 이르는 성곽을 허물고 그곳에 도로가 개설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도로는 일제 강점기에 본정통이라 불리면서 전주 상권의 중심 지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일제는 다시 서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도로를 확장하여 일본 상인들의 유입을 꾀하게 되는데 이곳은 대정통 혹은 대정거리라 불리게 된다. 본정통과 대정거리는 전주성의 성곽을 해체하고 전라감영과 전주부영의 건축물들을 철거하여 그 자리에 도로를 개설 일본 상인들을 의도적으로 유입하게 한 결과이며 그 결과는 곧 전주가 근대적 도시로 변모되는 시발점이 된 셈이다.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전주부성의 성벽 역시 1911년에 해체되는데 이 지역의 변모는 남문에서 서문에 이르는 지역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남문에서 서문 그리고 서문에서 북문에 이르는 거리에 일본 상인들의 유입이 활발해지는 데 반해, 경기전에서 향교에 이르는 교동 지역과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풍남문 지역에는 전통 가옥들이 들어서면서 한옥 밀집 지역을 형성하게 된다. 한옥 밀집 지역의 형성이 의도적인 결과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지역은 오목대, 향교, 경기전 등과 더불어 조선 건국조의 본향으로서의 자긍심과 전주의 유학자, 선비들이 그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려 항거한 자취가 완연한 곳임에 틀림없다. 이곳이 본정통, 대정거리와 상대적으로 왜인의 유입이 제한적이었으며 그와 더불어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며 지금의 한옥마을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한옥마을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풍남문, 경기전, 향교, 오목대, 학인당 등 조선의 역사적 숨결을 간직한 유적과 천주교 순교지로서의 상징성을 간직한 전동 성당이 있다. 그리고 혼불의 작가 최명희를 기념한 최명희문학관과 더불어 전주의 전통 문화를 한 자리에서 향유할 수 있는 전주전통문화센터, 전주공예품전시관, 전주명품관, 한옥생활체험관, 전통한지원, 한방문화센터, 전주공예명인관, 공예공방촌, 전통술박물관 등이 어우러져 전주 문화의 중심지로서 그 위상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옥마을은 전주국제영화제, 한지문화축제, 대사습놀이, 전주단오, 비빔밥축제, 세계서예비안날레, 약령시제전, 전주세계소리축제 등 전주의 크고 작은 문화제가 열릴 때마다 경향 각지는 물론 외국에서 온 손님들로부터도 각광받는 명소가 되고 있으며, 평소에도 전주 시민들이 전주를 방문하는 외지 사람들에게 전주의 멋과 맛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소개하는 사철 관광 명소이다.

1) 태조로

태조로는 한옥마을의 중심도로로서 기린대로와 접점인 풍남동 3가 19-5에서 전동 200-1 전동성당에 이르는 도로를 말한다. 이곳에 태조로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은 응당 태조 이성계를 기념하기 위함이다. 태조로가 시작되는 지점은 발리산 자락으로 발리산(發李山)이란 말 그대로 전주 이 씨가 비롯된 곳이란 뜻이다. 발리산은 조선시대 이전에는 산의 모양이 바릿대 같다고 하여 발대산, 발산(鉢山)이라 불렸는데 조선조 이후 발리산으로도 불린 것이다. 발리산에는 이목대와 오목대가 있는데 이목대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李安社)의 세거지인 자만동의 뒷산을 말하고 오목대는 태조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년)에 남원 운봉에서 왜장 아지발도의 무리를 무찌르고 돌아오다가 이곳에 머물러 개선잔치를 베풀었던 일을 기념하는 곳이다. 오목대에는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유허비가 있으며 목조 이안사와 관련한 호운석과 장군수 이야기가 호남읍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 이야기와 관련하여 설화로 전하는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호운석(虎隕石)과 장군수(將軍樹) 이야기

그렁게 옛날에 영감님이 그런 말씀을 허싰는디 이성계(이안사를 잘못 말함)가 전주 살면서 저 한벽당 있잖여. 한벽루. 거기서 놀면서 지금으로 말허자먼 왕초노릇을 혔어. 그 놀던 디가 발산 아래 있는디 이안사가 진법 연습을 잘 허고 놀아서 장군수라고 헌댜. 그렇게 애들허고 노는디 느닷없이 쏘낙비가 퍼 붓드랴. 근디 이렇게 넓적헌 바우가 산이서 한 멧 십 명 들어갈 우산맹이 생긴 바우가 있드랴. 그 밑이 다 들으가 있는디 한참 있응게 큰 호랭이 한 마리가 허엉 그러더니 굴 문 앞으 딱 바우 옆에 앉드랴. 그렁게 이안사가 말허기를 “야, 틀림없이 이중에 하나는 호랭이 밥이 될 사람이 있는디 누가 긴가를 모르겄다. 너그들 옷을 벗어서 호랭이 앞이다 던지자. 그런디 이안사가 옷을 벗어서 탁 던진게 호랭이가 앞발로 탁 받어서 안 놓고는 내둘내둘 허고 있드랴. 그렁게 이안사가 ”내가 호식헐 팔장게 너그들은 나오지 말고 여그 있어라.“ 허고 막 나간게 바우가 느닷없이 팍 떨어져갖고 탁 가라앉드랴. 긍게 그 밑이 있는 애들은 싹 바우한티 깔려 죽었지.

이목대, 오목대로 시작하는 태조로의 시점은 태조 이성계의 태생적 시원과 영웅 탄생의 시발을 상징하며 500년 왕조의 비조로서 태조의 위용은 경기전에서 꽃을 피운다.

2) 은행로

은행로는 충경로와 만나는 지점 경원동 3가 5-3번지에서 남천교와 만나는 지점교동 219-5까지의 도로를 말한다. 은행로라는 이름은 전주최씨종대(宗岱) 앞에 있는 은행나무로 말미암은 것이다. 종대란 종중 사무를 보기 위해 지은 건물을 말하는데 이곳 종대 역시 전통 한옥의 전형으로 한옥마을의 풍미를 더해줄 뿐만 아니라 종대 앞에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600년에 이르러 시도보호수 전북 제9-0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은행나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하나는 조선 전기의 학자 최담 선생이 자신의 서재터에 심은 것이라는 설과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최덕지(1384년~1455년)가 심었다는 설이 있다. 어떻든 은행로는 태조로와 더불어 한옥마을에서 중심이 되는 도로로서 태조로는 동서로 은행로는 남북으로 한옥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이다.

3) 동문길

동문길은 기린대로 접점 지점인 남노송동 536-14에서 시작하여 팔달로 접점 지역인 경원동 1가 24-2까지의 도로를 말한다. 동문길은 이 도로의 중간 지점이 전주성의 동문터인 데서 비롯된다. 전주성의 동문은 1734년 판관 구성필(具聖弼)이 축문하고 자신의 관직명을 따서 판동문(判東門)이라 불렸으며 1775년 전라감사 서호수(徐浩修)가 1767년 이른바 정해대화(丁亥大火)로 불타버린 문루를 다시 개축하여 완동문(完東門)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동문 근처에는 동문밖장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1911년에 동문이 헐리고 그 후 대정거리의 동쪽 끝 지역으로서 충경로가 생기기 전까지 전주의 도심을 동서로 가르는 중심 도로의 역할을 하였다. 동문길과 팔달로가 만나는 자리는 6,70년대에는 미원탑사거리 혹은 아카데미사거리라고 불리며 전주 도심의 한복판이었던 곳이다. 미원탑사거리에서 기린대로 방향으로 올라오면서 동문사거리, 동부시장, 관선교 등을 만날 수 있다. 한때 번화롭던 도로였던 이곳 동문길은 새로 뚫린 충경로에 밀려 이면도로가 되었으나 동문밖장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책방, 콩나물국밥집, 학원 등 전주 토박이들의 삶과 함께 호흡하며 여전히 전주의 고즈넉함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4) 어진길

어진길은 경기전 북쪽 담장에 맞닿은 길로 기린대로와 접점 지점인 남노송동 98-2에서 출발하여 팔달로와 접점 지점인 전동 135번지까지의 도로를 말한다. 이곳은 한옥마을의 다른 도로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한 데 비해 여전히 조용한 동네 뒷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도로이다. 이 길에 어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역시 경기전에 모셔져 있는 태조 영정과 관련되어 있다. 어진이란 임금의 초상화를 말하는데 경기전의 어진은 1987년 12월 26일에 보물 제931호로 지정되어 있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말한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경기전에 어진을 봉안한 것은 1410년(태종 10년) 즈음인데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내장산, 적상산성 등으로 피난한 적이 있으며 1767년 정해대화재 때는 전주향교 명륜당으로 피난한 적이 있었다. 현재의 어진은 1872년 조중묵(趙重默)이 원본을 그대로 모사하여 그린 것으로 현존 유일의 태조 어진이다.

5) 향교길

향교길은 팔달로 접점 지점 전동 226-2에서 전통문화센터 입구인 교동 19-3까지의 도로로서 도로가 끝나는 지점 부근에 향교가 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전주향교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명확한 기록이 없으며, 서거정의 부학기(府學記)에 따르면 향교가 전주부성 내에 있었는데 경기전이 들어선 뒤 향교와 진전이 너무 가까워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 때문에 태조 영령이 편히 쉴 수 없다고 하여 성의 서쪽 6,7리 되는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곳은 지금은 신흥학교 부근으로 당시 이곳은 부중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도둑이나 호랑이로부터 화를 입을까 염려하여 담장을 높이 둘렀다고 한다.(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3) 향교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때는 1603년(선조 36년)으로 좌묘우사의 법도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말미암은 것이다. 전주향교에는 공자의 사당인 문묘를 두고 있는데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무와 서무가 있고, 명륜당을 중심으로 양편에 동재와 서재가 있다. 대성전에는 유교의 성현들과 동방 18현의 신위가 모셔있다. 향교 앞에는 만화루(萬化樓)가 있는데 만화루는 본래 홍살문의 서쪽에 있었다. 향교의 부속 건물로 사마재(司馬齋), 양사재(養士齋), 장판각(藏版閣) 등이 있는데 사마재와 양사재는 강학당으로서의 기능을 하던 곳으로 양사재는 아직 초시를 치르지 못한 선비들이, 사마재는 사마시에 합격한 생원 진사들이 학문이나 정치를 논하는 장소였다. 장판각은 전주향교 동재 뒤편에 있는데 전주감영에서 발행한 여러 책들을 출판했던 목판을 보관해온 곳으로 전주가 출판문화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했던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전주향교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유교의 성현과 향교에 모셔진 18위의 성현에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중요무형문화제 85호)가 열리며 500년 이상 된 은행나무는 특히 가을 정취를 아름답게 하기로 유명하다. 향교길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정취는 학인당(學忍堂)이다. 학인당은 1976년 시도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된, 한옥마을을 대표하는 전통가옥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학인당 대문에는 백낙중지려(白樂中之閭)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백낙중의 효행으로 말미암아 고종황제로부터 승훈랑 영릉참봉을 제수받은 까닭이다. 이 건물은 압록강, 오대산 등지의 목재를 운반하여 연 인원 4,280명이 2년 6개월에 걸쳐 건축되었으며 백미 4000석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현재 520평 대지에 사랑채, 안채, 별당채, 뒤채, 헛간, 쌀광 등 일곱 채의 건물만 남아있으나 건축될 당시에는 2000평에 아흔아홉 칸짜리 대 저택이었다고 한다. 학인당에는 판소리를 공연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백범 선생 등 정부요인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한국전쟁 때는 공산당 도당 위원장이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6) 최명희길

최명희길은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작가 정신을 기념하는 최명희문학관에 닿아 있는 길이다. 작가 최명희는 1947년 전주 풍남동에서 태어나 풍남초등학교, 전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 기전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퇴직할 때까지 전주에서 생활하며 자신의 문학적 토양을 다져왔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작가적 역량을 키워 오다가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단편 ⌜쓰러지는 빛⌟ 으로 당선된 이후 1985년 ⌜혼불⌟에 전념하여 1998년 전5부 10권의 책을 출간하기까지 무려 17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손가락으로 바위에 글씨를 새기듯 글을 써왔다. 안타깝게도 작품이 출간된 해 겨울 향년 51세의 나이로 영면하였으나 그의 위대한 정신은 지하의 만월이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믐은 지하에 뜬 만월,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 나의 넋이 찍히는 그 무늬를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등 그의 정신세계를 느끼게 하는 작가의 글과 말을 최명희문학관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7) 오목대길

오목대길은 오목대의 남쪽에 위치한 ‘쌍시암’ 마을에서 시작하여 교동 98-9번지까지의 길이다. 이곳에 오목대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쌍시암 마을 뒷산에 오목대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목대는 발리산 자락이 뻗어내린 끝자락에 세워진 정자의 이름이며, 이성계가 남원 운봉의 황산에서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대파하고 이곳에 들러 전주 이 씨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여 승전을 자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곳 사람들 사이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성계가 적장 아지발도를 격파할 때 보인 뛰어난 무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성계가 왕이 되려는 야심을 드러내자 이에 분노한 정몽주가 남고산성의 만경대에 새겼다는 한시 이야기다. 진위 여부는 다소 미심쩍으나 어떻든 그만큼 오목대는 600여 년의 세월이 넘도록 세인의 마음에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대풍가
大風起兮雲飛揚, 큰바람이 일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威加海內兮歸故鄕, 바람의 위세가 바다에 더해 고향으로 돌아왔네.
安得猛士兮守四方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소냐.

정몽주의 시
千仞崗頭石逕橫 천길 바위 머릿돌 길을 비끼어
登臨使我不勝情 올라서니 내 심사 걷잡을 수 없도다.
靑山隱約夫餘國 푸른 산은 말없이 부여국을 기약했건만
黃葉繽紛百濟城 누런 낙엽만이 백제성에 흩날리누나.
九月高風愁客子 구월 높은 바람은 나그네의 심사를 쓸쓸하게 하고
百年豪氣誤書生 백년 호기는 서생으로 끝나가야만 하는도다.
天涯日沒浮雲合 해는 하늘 너머로 지고 뜬 구름은 한곳에 모여드노니
矯首無由望玉京 고개 돌려 속절없이 임금이 계신 개경만 바라보노라

8) 전동성당길

전동 성당 자리는 본래 1791년 12월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제사를 폐하고 천주교식 장례를 치렀다는 이유로 외종형 권상연과 함께 참수를 당한 한국 교회사 상 최초의 순교지이다. 그 후 1801년 10월 24일에는 유항검과 그의 동료 윤지헌 등이 천주를 신봉하고 선교사를 영입했다는 죄목으로 목이 베이고 사지가 잘린 치명터이기도 하다. 보두네(Baudounet) 신부가 1885년 입국하여 1889년 소양면 대성동에 은신했다가 1891년 전동 성당터에 민가를 사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벌이게 된다. 처음에는 신자의 수가 많지 않았으나 동학농민전쟁을 겪으면서 신자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1908년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외관은 1914년에 완성되었으며 1931년에 완공되었다. 이 성당은 호남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건물 양식은 로마네스크이며 돔과 석조 기둥은 비잔틴 양식이다. 한국 교회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로 손꼽혀 영화 촬영이나 결혼식 장소로도 자주 쓰이기도 한다. 이곳은 1981년 9월 25일에 사적 288호로 지정되었다.

9) 경기전길

경기전길은 은행로와 더불어 한옥마을을 남북으로 가르는 길로서 조선시대에는 전주부성의 남문과 동문을 잇는 성곽이 있던 곳이다. 충경로와 맞닿은 지점에서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경기전 동편 담을 만나게 된다. 경기전은 전주를 역사성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위패를 봉안해 놓은 곳이다. 태종 때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전주, 경주, 평양에 봉안하고 제사 지내는 전각으로서 어용전이라 하였는데 태종 12년(1412)에 태조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 22년(1442년)에 이곳은 왕조의 발상지로서의 의의를 기념하기 위해 경기전(慶基殿)이라 부르고, 경주와 평양은 각각 집경전, 영흥전이라 불렀다. 경기는 국가 창업의 경사스러운 토대가 된 곳이란 의미이다. 경기전 안에는 정전과 조경묘가 있는데 정전은 어진을 봉안한 곳이며 정전 북쪽에는 태조의 22대 조이며 전주 이 씨의 시조인 이한(李翰)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 조경묘(肇慶廟)다. 시조의 묘와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비조의 영정이 있는 한 이곳 전주는 왕조의 발상지로서 조선의 성지 중의 성지며 그 중심에 경기전이 있다. 경기전 안에는 또한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있다. 전주사고에는 세종 27년(1445년) 12월에 태조, 정종, 태종의 3조 실록이 분장되어 있었다. 이 실록은 부성 안에 있는 승의사와 진남루 등에서 보관되기도 하였는데 성종 4년 전주실록각이 세워지면서 이곳에 보관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태인의 선비 안의(安義), 손홍록(孫弘綠)이 태조의 어진과 사고의 전적, 실록, 고려사 등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에 옮겨 놓았으며 이듬해 7월에 영정을 충청도 아산으로 옮기고 실록은 해주로 옮겼다. 경기전은 선조 31년(1598년) 왜란으로 말미암아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6년(1614년)에 관찰사 이경동(李慶同)이 중수하였다. 경기전을 지나 전주천변 쪽으로 난 길은 세칭 베테랑골목이다. 이곳은 베테랑칼국수 집이 유명해진 후에 학생들 사이에 불리는 애칭이 되었다. 이 길에는 삼성전당포라는 간판이 붙은 이층 개량 한옥과 삼원한약방이 있는데 이곳의 풍경이 개화기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그 나름의 정취가 있다.

10) 술도가길

술도가길은 경원동 3가 93-31에서 풍남동 3가 16-21에 이르는 도로로 리베라 호텔 뒤편 길이다. 술도가길이라는 이름은 예전에 이곳에 술도가가 있었으며 현재 전주전통술박물관이 있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술박물관은 2002년에 개관하여 우리의 전통술 즉 가양주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개관되었다. 가양주란 집에서 담근 술을 가리키는데 예부터 집안마다 술을 빚는 방법과 솜씨가 달라 다양한 맛과 향을 가진 술을 빚어 손님을 접대하는 풍습이 있었다. 오랜 시간의 깊이를 가진 술 빚는 솜씨 역시 전주의 풍미를 다채롭게 하는 옛 문화 가운데 하나이어서 술도가길에서 만나는 가양주 문화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전주 이야기의 한 부분이다.

전주 천변 지역

전주 천변 지역

1) 전주천동로
- 기점 : 교동 2-9
- 종점 : 진북동 1166-1
2) 전주천서로
- 기점 : 동서학동 886-10
- 종점 : 서신동 770-9

전주천동로는 한벽루 아래에서 전주천을 따라 난 제방도로를 따라 남천교, 싸전다리, 매곡교, 서천교, 완산교, 다가교, 도토리골교, 어은교, 진북교, 서신교를 지나 터미널사거리까지의 도로이다. 전주천서로는 한벽교 삼거리에서부터 전주천동로와 나란히 이어지다가 백제대교 앞까지의 길이다. 전주천은 조선시대 전주부성의 남쪽과 서쪽을 에둘러 흐르고 있다. 그래서 각각 남천과 서천이라고 불려 왔는데 전주천 물줄기의 위치 변화는 곧 전주 부성 지역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지형적 기초를 제공한다. 전주천은 임실 슬치에서 발원하여 추천에 합류 만경강의 지류를 형성하는 물줄기인데 전주 시내에 들어와서의 물줄기는 그 방향이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전주천은 본래 오목대산 아래를 지나 시내를 관통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게 보면 현재 전주의 구도심 지역은 과거에 전주천이 형성한 넓은 하천 지대였을 것이며 그 당시에는 기린봉 기슭에서 종광대에 이르는 산자락에 주거지대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후백제 시대 견훤궁터가 종광대 산에서 기린봉, 승암산 자락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가설의 근거가 된다. 그 후로 전주천은 퇴적에 퇴적을 거듭하면서 지금의 남천과 서천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전주 구도심 지역은 전주천의 물줄기가 남쪽과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형성된 평야지대 위에 형성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연적 조건을 삶의 배경으로 삼던 시절에 물줄기의 영향력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일차적 여건이라는 점에서 전주천은 전주의 형성 과정뿐만 아니라 전주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전주천을 중심으로 양쪽의 제방도로에 ‘전주천로’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다만, 전주천이 ‘남천’과 ‘서천’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남천’ 부근에서는 제방도로가 남북 방향으로 나뉘기 때문에 과연 ‘동로’와 ‘서로’라는 명칭 부여가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이견이 있었으나 전주천이 결국 남에서 북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동서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져 전주천의 북동쪽 제방도로는 ‘전주천동로’, 남서쪽 제방도로는 ‘전주천서로’로 부르게 되었다.

① 남천표모
한벽루와 싸전다리는 완산팔경의 하나인 남천표모(南川漂母)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다. 남천표모는 남천에서 빨래하는 풍광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으로 수도가 보편화되기 전까지는 이곳은 아침 식사를 마친 아낙네들이 각자 빨랫감을 이고 와서 빨래를 하는 통에 언제나 빨래방망이질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물가에 줄지어 빨래를 하는 여인네들과 아이들이 물장구치며 노는 소리, 빨래를 삶느라 여기저기 피워놓은 장작불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빨래 연기 등은 전주 사람들에게 정겨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② 남천교
전주부성을 지나 남원 방면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가 남천교이다. 남천교는 홍예교, 홍교(虹橋), 오룡교(五龍橋), 안경다리, 남천석교, 새다리 등의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 유서가 깊은 다리이다. 남천교라는 다소 건조한 이름에 비해 홍예교, 혹은 홍교라는 이름은 제법 상상력과 운치가 있는 이름이다. 홍예교가 놓인 것이 정조 15년, 우리말로는 무지개다리다. 홍예교는 무지개의 모습처럼 반원을 그리며 다리의 가운데 부근이 제방 쪽 부근에 비해 다소 돋아있었을 것이다. 2010년에 개통된 지금의 남천교는 바로 홍예교의 옛 모습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건한 것이다.

③ 남문시장
조선시대 전주부성의 사대문 주변에 형성된 시장 가운데 남문 주변의 시장이 그 규모가 가장 컸다. 조선시대 남문시장 인근 천변 지역 역시 전주시민은 물론 상관, 구이, 이서 등 전주 근교의 주민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장사진을 이루었다. 전주천동로와 전주천서로를 잇는 다리 이름들이 과거에 미전교(米廛橋 지금의 전주교, 싸전다리), 연죽교(煙竹橋 지금의 매곡교), 염전교(鹽廛橋 지금의 완산교)는 모두 천변을 따라 선 시장들과 연관되어 있어 남문시장을 주변으로 한 천변 풍경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한다. 미전교는 싸전다리, 연죽교는 설대전다리, 쇠전다리, 시장다리, 장다리, 염전교는 소금전다리라는 고유어 식 이름들이 있으며, 그 이름들 속에 싸전다리에서부터 전주천을 따라 좌우 강변에 형성된 여러 시장들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④ 다가교와 서문
조선시대 전주부성의 서문과 다가산과 유연대 사이의 선너머를 잇는 다리를 사마교(司馬橋)라 불렀다. 이곳은 전주향교의 부속 건물인 사마재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곳은 조선시대에 사직단, 희현당, 화산서원 등이 있었다. 그래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유생들이 글공부를 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특히 근대화시기에 서양의 선교사들이 교육과 의료를 통해 선교 활동을 펼쳤던 곳이기도 하며 일제 강점기에는 다가산에 신사를 세워 신사참배를 강요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사마교, 일제 강점기에 대궁교 그리고 지금은 다가교로 불리는 이 다리는 다리 이름의 변천은 시대의 변천을 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신흥중고등학교, 예수간호대학교, 예수병원, 서문교회 등은 전주의 개화기를 반영하는 문화적 기호이기도 하다.

⑤ 도토릿골과 어은교
‘다가교’를 지나면 첫 번째 만나는 다리가 ‘도토릿골교’다.‘도토릿골’과 마주한 부성 쪽으로 석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석보에서 지금의 태평동 쪽, 이전 시기에는 장재뜰에 생활용수를 대는 물길이 하나 있었다. 그 물길을 따라 부성의 서북쪽에는‘비석거리’와 ‘물방앗골’이 있었다. ‘도토릿골교’ 다음은 ‘어은교’다.‘어은교’역시 마을 이름을 빌어 명명된 것으로,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들이 은둔했다고 해서 은사골, 골짜기가 잉어가 숨어 있는 혈 같은 모양을 이룬다고 해서 ‘어은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3) 어은로(길)
- 기점 : 중화산동 2가 650-8
- 종점 : 진북동 992-129

어은로는 백제로 어은터널사거리에서 어은터널을 지나 어은교까지의 길을 이르며 어은길은 어은골 동네 안에 있는 길들을 말한다. 어은로 역시 동네 이름으로부터 유래된 도로명이다. 유연대에서 서살미, 청수코테기로 이어지는 유연대 자락의 동편과 전주천 서편 사이에 도토릿골, 어은골 그리고 서신의 여러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다. 어은골은 유연대날맹이에서 이어지는 학날과 서살미가 둥근 반원을 그리며 만든 품에 자리를 잡고 있다. 어은골 앞으로는 논과 밭이 있었으며 논 가운데 방죽이 있었다. 이 방죽은 정진사댁 방죽이라고 불렸으며 방죽 근처에 정씨 제각이 있었다. 유연대산자락으로부터 전주천에 이르기까지의 논들은 비탈진 산자락에 빼곡하게 자리잡은 다랑논들이어서 이 논들을 다랑배미라고 불렀다고 한다. 다랑배미 논에는 해방 후 난민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새동네라 불리는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6,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전주시내의 분뇨를 이곳에 부어 놓으면 서신동, 중화산동 사람들이 농사짓는 거름으로 사용해왔다고 한다고 한다. 어은이란 지명을 가진 곳이 전국적인 분포를 가지고 있으며 물고기와 관련되어 있다. 보통은 물고기 혹은 어부가 숨는다는 뜻의 한자어 魚隱, 漁隱으로 표기된다. 어은은 보통 하천, 강변 마을에 붙어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둔하며 살아가는 선비를 비유해서 말하기도 하고 산의 지형이 잉어 같은 물고기가 숨어 있는 형국이라고 풀이하는 경우도 있다. 이곳 어은동 역시 풍수지리적 특성상 잉어가 숨은 혈이 있다는 풀이를 하거나, 은둔 거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속설 그리고 전주천의 고기가 숨었다가 가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라고 한다. 어떻든 전주부성을 기준으로 보면 어은골은 부성 서북 편에 전주천을 건너 유연대 산 밑 마을이어서 세 가지 가능성이 모두 충족되는 지형적 특징을 가진 곳으로 보인다.

4) 도토리골길

도토릿골길은 도토릿골 마을 안에 있는 길들을 이른다. 도토릿골은 구 진북교를 건너 유연대 산 아래 있는 동네이다. 마을 뒤에 있는 산등성이를 동네사람들은 유연대말랭이라고 부르는데 이 유연대말랭이에서 양쪽으로 타원형을 그리며 양쪽 산줄기에 쌓여 있는 마을이 도토릿골이다. 가운데 산등성이를 두 개의 산줄기가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마치 배의 돛대 형국과 같다고 해서 돛대골, 주동(舟洞)이라 불렸다고 한다. 한편 같은 지형을 가지고 학이 날갯짓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도토릿골을 둘러싼 산줄기를 학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어떻든 전주천까지 뻗어있던 양쪽 산자락은 잘리고 그 자리에 제방도로가 생겼다. 도토릿골이라는 말은 돛대골로부터 잘못 이해된 말인데 이곳이 도심과 가까이 있으나 전주천 너머에 있어 후미진 산골로 인식되면서 도토릿골이라는 동네 이름이 외부로부터 통용되기에 이르렀고 동네 앞에 도토릿골교가 세워지고 나서는 도토릿골이라는 동네 이름이 돛대골보다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삼천 천변 지역

삼천 천변 지역 이미지

1) 강변로
- 기점 : 삼천 1가 766-1
- 종점 : 서신 761-1

강변로는 삼천의 동쪽 제방도로를 가리킨다. 강변로는 세내교에서 시작하여 우림교사거리, 이동교, 효자다리, 마전교, 홍산교를 지나 온고을로까지 이르는 길이다. 삼천은 완주군 구이면과 임실 운암, 신덕면 경계에 걸쳐 있는 오봉산에서 발원하여 삼천, 평화동 주변의 난전들, 거마평 등을 두고 추천대 부근에서 전주천 물길과 만나 만경강의 지류를 형성한다. 이 지역은 2000년 이전까지는 전주의 외각 지역으로서 도시와 농촌의 전이지대를 형성하던 곳이었으나 천변을 따라 아파트와 상가가 세워지면서 신흥 도심 지역으로 급속하게 발달해 왔다. 최근 삼천을 따라 조성된 산책공간은 아파트 주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사실상 강변로라는 도로명은 ‘삼천로’나 ‘삼천’의 고유 이름 ‘세내’를 이용한 ‘세내로’ 등이 이치에 맞다. 이곳에 흐르는 물줄기가 00강이 아니라 ‘삼천’이란 이름이 있어 굳이 말하자면 ‘천변’에 해당하므로 ‘천변로’가 합당하다. 그럼에도 굳이 ‘강변로’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은 ‘천변’에 비해 ‘강변’이 주는 느낌이 크고 시원하다는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다. 강변로 주변에는 삼천동 주공아파트를 필두로 삼천리젠시빌, 신일강변, 효자동현대, 광진리미안, 광진햇빛찬, 화산코오롱하늘채, 서신성원, 쌍용서신아파트 등 아파트 밀집지대가 이어지고 있어서 거주 휴식 공간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2) 서신천변로(길)
- 기점 :서신동 853(키즈클럽)
- 종점 : 서신동 796-5(풍년제과빌딩)

‘서신천변로’는 이전 시기에 서신천과 고사평 사이의 들녘으로 지금은 서신천과 서신로의 주택 및 상가 지역 사이에 형성된 도로이다.‘천변로’가 하천의 제방을 따라 난 길을 의미하는 것이 보통인데 삼천천 제방을 따라 가설된 도로 전체를 이미 강변로로 명명한 까닭에‘서신천변로’는 하천의 제방 도로가 서신동의 천변 지역에 형성된 아파트와 상가 지역에 형성된 도로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신천이란 이름은 서신동이라는 행정명칭을 따라, 삼천천의 물줄기 가운데 서신동 지역에 해당하는 물줄기를 명명하게 된 데서 비롯된다. 서신천변은 전주의 여느 천변과 마찬가지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여가와 휴식을 즐기는 도심 속의 자연친화적 공간으로서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3) 삼천, 효자, 화산천변로(길)

삼천천의 동편 제방을 따라 난 도로에 강변로라는 이름이 붙게 됨으로써 제방도로에 인접해 있는 주택 단지들의 이면 도로에는 동일한 방식으로‘법정동 명칭 + 천변길’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삼천동 지역은 삼천천변길, 효자동 지역은 효자천변길, 화산동 지역은 화산천변길, 그리고 서신동 지역은 서신천변길과 같은 방식이다. 삼천천변길에는 삼천뜨란채, 주공아파트, 우성삼천아파트 등이 있다. 효자천변길에는 효문초등학교, 풍남중학교, 효림초등학교와 신일강변, 승일삼천하이츠, 한강, 제일효자타운, 우성상신타운, 삼성효타운 아파트 등이 인접해 있다. 화산천변로에는 화산코오롱하늘채와 현대에코르아파트가 있다.

용머리 지역

용머리 지역 이미지

1) 용머리로
- 기점 : 효자동 1가 410-5
- 종점 : 서완산동 1가 508

용머리로는 우림교에서 시작하여 효자광장사거리, 용머리를 지나 완산교에 이르는 길이다. 완산동 용머리고개는 지형적으로는 완산의 산자락과 다가산이 이어지는 산마루이다. 이곳은 전주부성의 남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완산교를 지나 금구로 나가는 길목이다. 용머리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지형적 유사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다가산과 유연대 자락과 연계해서 생각하면 이곳이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 또한 이곳에는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초립동이로 변한 용을 알아본 강감찬 장군이 가뭄 때문에 고생하는 백성들을 외면한다고 호통을 쳐 그 용이 비를 내리게 하고 이곳에 떨어져 죽어, 강 장군이 그 용의 주검에 치사하고 후히 장사지냈다는 이야기다. 강감찬 장군의 애민 정신에 신통력까지 가미된 다소 허황한 이야기지만 어떻든 이곳은 용의 기운이 서린 땅이며 그것이 백성을 안녕을 기원하는 강감찬 장군을 흠모하고 기리는 마음의 발로이어서 또한 역사 이면의 역사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라 할 만하다.‘용머리로’라는 도로명 역시 그러한 상징성을 수용한 셈이다.

2) 매곡로
- 기점 : 동완산동 99-3
- 종점 : 동완산동 397-1

용머리로는 우림교에서 시작하여 효자광장사거리, 용머리를 지나 완산교에 이르는 길이다. 완산동 용머리고개는 지형적으로는 완산의 산자락과 다가산이 이어지는 산마루이다. 이곳은 전주부성의 남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완산교를 지나 금구로 나가는 길목이다. 용머리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지형적 유사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다가산과 유연대 자락과 연계해서 생각하면 이곳이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 또한 이곳에는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초립동이로 변한 용을 알아본 강감찬 장군이 가뭄 때문에 고생하는 백성들을 외면한다고 호통을 쳐 그 용이 비를 내리게 하고 이곳에 떨어져 죽어, 강 장군이 그 용의 주검에 치사하고 후히 장사지냈다는 이야기다. 강감찬 장군의 애민 정신에 신통력까지 가미된 다소 허황한 이야기지만 어떻든 이곳은 용의 기운이 서린 땅이며 그것이 백성을 안녕을 기원하는 강감찬 장군을 흠모하고 기리는 마음의 발로이어서 또한 역사 이면의 역사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라 할 만하다.‘용머리로’라는 도로명 역시 그러한 상징성을 수용한 셈이다.

3) 완산길

유래 및 의의
전주시는 19일 시청앞 중앙간선도로를 팔달로로 명명 발표했다. 두 차례에 걸쳐 도로명을 공모, 80명에 1백45건의 응모로 2명이 당선됐다. 당선자는 다음과 같다. 한병희(전주시 다가동 4가 18), 이동명(전주시 동완산동 48).

주변 환경
① 백운정동네 : 백운정 동네는 완산초등학교 남쪽 벽과 완산칠봉 사이에 있는 마을을 가리킨다. 백운정(白雲亭)은 전 현감 백치언(白致彦)이 세웠다가 허물어진 것을 그의 증손 백남신(白南信)이 중건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취가 남아있지 않다.

② 청학루 골목 : 백운정과 짝을 이룬 건물이 청학루인데 청학루는 1921년 박기순(당시 상업은행 은행장)이 비장청 건물을 뜯어 옮겨지었다고 한다. 그 후 예식장, 전주국악원 등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그 자리에 태화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예전에 청학루 밑의 골짜기가 소꼬리 모양의 지형이라하여 소꼬랭이라 불렸으며 소꼬랭이 남쪽으로 난 골짜기는 호래벗골이라고 불렀으며 호래벗골 끝자락에 있는 지금의 땀띠시암은 예전에 호래벗골물터라고 불렸다고 한다.

③ 기령당길 : 기령당은 본래 군자정이었는데 군자정은 조선 현종 3년(1662년)에 전주의 유지들이 용머리고개 동쪽 기슭에 세운 정자였다. 군자정은 전주의 유지들이 활을 쏘며 교유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는데 영조 43년(1767년)에 전주부성에 큰 불이 났을 때 군자정 현판이 바람에 날려 이곳에 떨어지자 이것을 지신의 계시로 보고 정조 12년에 이곳 기령당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그후 1912년 전주부내의 세 사정, 군자정, 다가정, 읍양정이 천양정으로 합정되면서 군자정은 기령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전주의 유지들이 드나드는 경로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기령당에는 고려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주에 부임하는 기관장들이 이곳을 찾아 전주의 원로들을 만나면서 남긴 방명록의 일종인 선생안이 남아있다.

4) 곤지산길

곤지산 1-4길은 곤지산 주변의 길들을 이른다. 곤지산길은 응당 곤지산을 기념하는 데서 비롯된다. 곤지망월은 전주십경의 하나이다. 곤지산에 올라 기린봉에서 솟아오르는 달을 구경하는 풍광이 아름다움을 이르는 말이다. 망월의 정취는 잠시 접어두고 곤지산은 전주부성의 남문과 마주하며 건지산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할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호남읍지 등에서 전주부성을 중심으로 건지산과 곤지산이 각각 주산과 안산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곤지산은 전주부성이 자리를 잡을 방향을 가늠하는 기준점이 된 산이다. 한편 김두규(2004)에서는 전주의 진산을 논한 바 있는데 이 책에서는 구전주상고 운동장에서 기린봉으로 이어지는 방향을 중심축으로 정하고 곤방인 서학동 방향으로 곤지산이 있고 북서쪽 곤방으로는 건지산이 있어서 각각 건지(乾止), 곤지(坤止)의 의미는 좌청룡 우백호 중 건지는 우백호의 끝, 곤지는 좌청룡의 끝으로 해석한 바 있다. 곤지산 자락에는 두 가지 역사적 사연이 전해지고 있는데 하나는 곤지산 자락에서 전주천 방향으로 뻗어내린 곳을 초록바위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있었던 두 아이의 순교며 또 다른 하나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이곳이 전주성을 공략할 중요한 요충지였다는 점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남종삼(南鐘三)의 큰 아들 남명희(南明熙)와 역시 남종삼과 함께 순교한 홍봉주(洪鳳周)의 아들이 부모가 순교할 당시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으므로 전주성에 감금하였다가 1867년 15세가 된 후에 초록바위에서 수장시켜 처형되었다. 당시 전라감사는 두 아이에게 너희들마저 처형되면 대가 끊기니 개종하여 새 삶을 찾으라는 회유를 하였으나 끝내 거부하였다고 한다. 또한 곤지산은 울창한 숲을 형성하였고 곤지산 끝이 절벽이어서 전주부성과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농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때나 경군이 농민군이 있는 전주성을 공격할 때 선점해야 할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고 한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공략할 때도 이곳에 진을 쳤으며 경군이 농민군을 공략할 때도 이곳과 완산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지금은 곤지산 자락에서 전주천까지 뻗어내린 산자락이 깎이고 그곳에 길이 났지만 예전에는 이곳이 비가 오는 날이면 무서워서 지나기조차 꺼렸던 곳이라고 한다.

5) 강당길

다가산록 천양정 남쪽 담을 끼고 지금의 우석대 한방 병원 쪽으로 난 길은‘강당재’로 올라가는 길목이다. ‘강당길’은 바로 이 ‘강당재’에서 비롯된 이름이다.‘강당재’를 넘어가면 미나리깡과 화산공동묘지가 있었다. ‘강당재’는 도심과 가까운 곳이지만 상당히 후미진 곳처럼 보인다. 그러나 강당재 너머의 여러 마을 오두리, 안행, 쌍룡, 중산, 하리, 뒷골 등지의 주민들이 완산교를 지나 남문시장을 갈 때 이 고개를 이용해 왔다. 강당재 너머의 지역은 택지개발이 완료되어 예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강당재를 넘기 전 빙고리와 천양정 주변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강당재가 도심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나무가 우거지고 길이 후미져 강당재라는 지명에 대해서도 다양한 추측이 난만하다. 예를 들면 강도가 많아서 강도재라고 했다는 설도 있고 강당이라는 말만으로 이곳에 강당이 있었다는 추측을 하기도 하나 이곳에는 강당이 없었다. 그렇다고 강도가 강당으로 변했다고 주장하기에도 소리 변화의 일반성에서 벗어난다. 그런 점에서 왜 이곳이 강당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화산서원 주변이 결국 강당인 셈이어서 화사서원에 인접한 즉 강당과 인접한 재라는 뜻으로 강당재가 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6) 빙고리길

다완산교에서 용머리고개로 난 길과 다가산 사이는 조선시대 빙고리(氷庫里)였다. 말 그대로 이곳에 얼음을 보관하는 곳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인데 빙고의 위치는 예전의 예수병원 아래 굴의 형태로 있었다고 하며 이곳을 빙고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전주부성에서 매우 가까우며 용머리에서 다가산으로 이어지는 산언덕이 가파르고 깊은 데다가 골짜기가 동북향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해가 잘 들지 않는 지역이어서 도심에 가까우면서도 숲이 울창하고 골이 깊은 편이어서 지형적으로 빙고를 두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7) 따박골로(길)
- 기점 : 효자 1가 640
- 종점 : 중화산 2가 536-1

따박골로(길)은 백제대로와 용머리로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북동쪽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에는 한두평공원을 중심으로 남서편으로는 여관촌 북서쪽으로는 여관촌과 상가 새전주병원 한두평공원 동쪽으로는 송원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따박골은 다른 이름으로 따빗골이라고도 한다. 따비는 땅을 뒤집거나 나무 뿌리 등을 캘 때 삽처럼 밟아서 땅을 파거나 뒤집는 데 쓰는 도구이다. 보통 따비의 형태는 가운데가 비어있고 양쪽에 길게 날이 있는 형태이다. 따빗골의 지형 역시 따비의 양 날에 해당하는 산줄기가 나란히 뻗어 있고 그 사이에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따박골은 따빗골에서 비롯되었으나 소리의 변화로 말미암은 것이다.

8) 외칠봉길

외칠봉길은 현재 안행골프장과 도토리빌라 등이 있는 정혜사 서북편 지역의 도로를 말한다. 외칠봉은 완산칠봉의 하나이다. 완산과 완산칠봉은 전주를 상징하는 산 가운데 하나로 보통 기러기 형국이라고 한다. 이철수(1997)에 따르면 완산칠봉의 내칠봉은 수봉(장군대좌봉) 동경으로 탄금봉, 매화봉, 서경으로 옥녀봉, 무학봉, 백운봉, 용두봉, 외칠봉(후면)은 수봉 남경으로 검무봉, 선인봉, 목단봉, 금사봉, 도화봉, 매화봉이 있고 좌우칠봉 서쪽 조두정과 남동의 장승백이 쪽에서 바라보면 칠봉의 산용이 완연하다고 적고 있다. 완산칠봉의 여러 봉우리마다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이 물론 감여가의 말장난일 수도 있으나 완산에 대한 전주 시민들의 애정에서 비롯된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외칠봉길은 완산칠봉 가운데 외칠봉 자락에 닿아있는 도로이어서 그렇게 명명된 것이기도 하며 완산칠봉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애정을 반영한 도로명이기도 하다.

9) 유기전길

조선시대 3대 장시로는 보통 대구, 전주, 안성을 꼽는다. 안성은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서울에 갈 때 거쳐 가야 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장시의 성장을 위한 입지조건을 가졌으며 대구와 전주는 각각 경상도와 전라도의 행정, 문화, 경제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각처의 산물들이 이곳에 모이게 된 까닭이다. 기록에 따르면 장시의 시작은 15세기 초엽 전라도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특히 조선은 중농 억상정책을 썼기 때문에 장시의 형성이 관의 주도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민간 주도로 이루어진 자생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전주의 경우는 부성의 각 문 근처에 장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남문밖장이 가장 규모가 컸다. 전주천변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싸전, 쇠전, 닭전, 곡물전, 옹기전, 포목전, 지전, 어물전, 과일전, 철물전, 가마전, 나무전, 가마전, 유기전, 자리전, 신전, 소쿠리전, 채소전, 약전 등 경향 각처에서 온 가지각색의 물건들이 거래되었으니 당시 전주의 경제에 대해서도 다시금 조명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장터는 단지 경제활동만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임금의 윤음, 관의 방 등을 붙여 백성과 소통할 뿐만 아니라 이른바 괘서 즉 지배층의 폭정과 수탈에 대한 폭로나 시정을 요구하는 글 등이 붙어 공적 소통의 장이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점을 이용하여 공개 처형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 판 돈을 노리는 투전꾼들, 힘 꽤나 쓰는 이들이 벌이는 상씨름, 국밥집, 막걸리집 등 그야말로 온갖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행위가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전주장에서 유기전은 완산다리에서 용머리고개를 가는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유기전은 주발, 탕기, 양푼, 쟁반, 제기, 접시, 향로, 요강, 촛대 등 놋기를 파는 곳이어서 놋점이라고도 한다. 유기전길와 조선시대 유기전길과는 거리상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조선시대 3대 장의 하나인 전주장의 규모와 위상을 생각할 때 전주장을 기념하는 도로 이름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10) 안행로(길)

안행동은 구한말 전주군 우림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우림면 송정리, 1935년 완주군 우전면 송정리, 1957년 이래 전주시 효자동에 편입되었다. 선너머에서 예수병원을 지나면 서부우회도로 선너머네거리를 만난다. 선너머네거리에서 이동교 완산구청 쪽으로 내려오면 지금의 완산구청 앞 동네가 안행동이다. 예수병원을 넘어 이동교까지의 신작로가 생기기 전까지 이곳은 강당재를 넘어 곧장 내려오는 길로 드나들었다. 강당재를 넘어서 곧장 내려오면 오두리, 오두리 방죽을 지나 안행동이다. 안행동 앞으로 난 길로 내려가면 연이어 쌍룡, 신봉. 하리, 이동교로 이어진다. 안행동은 유연대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산자락을 배경으로 남향으로 자리를 잡은 마을이다. 안행(雁行)이라는 말은 기러기의 행렬이라는 뜻으로 남의 형제를 높여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표준어로는 ‘안항’이라고 발음한다. 어떻든 행정명칭으로 그리고 지명으로 굳어진 안행과 안항은 다른 의미겠지만 기원적으로는 기러기의 행렬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는 인근 산의 지형이 기러기가 줄을 지어 날아가는 형국으로 추측할 수 있다. 지금 안행동 앞은 한 블록 넘어 새로 길이 나는데 효자지구, 중화산동 택지개발 사업이 시행되던 1980년대 초중반 무렵의 일이다. 그 후부터는 신리 삼거리 지금의 안행교 사거리까지 나가야 차를 탔던 불편을 해소하게 된다.

11) 효동길

효동길은 효자동이라는 행정명칭에서 아들 자 자를 빼고 효동이라고 명명한 데서 유래한 도로명이다. 이 지역에 특기할 만한 명칭을 찾지 못해서 효동이라는 이름을 붙여 도로명을 부여하게 되었다.

서학 지역

서학 지역 이미지

1) 서학로(길)
- 기점 : 서서학동 48-6(제일수족관)
- 종점 : 동서학동 932-2(상수도계량기시험소)

서학로는 팔달로와 전주천서로가 만나는 싸전다리 지점에서 교대부속초등학교 정문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전주교대를 지나 춘향로와 만나는 도로를 이른다.‘서학로’역시 이 지역의 행정 명칭 서학동에서 비롯된다. 서학(捿鶴)은 학이 깃든다는 뜻으로 남고산에서 흘러내린 산자락이 마치 학이 날개를 편 형국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학의 모습이 본래는 쌍학의 모습이었는데 현재 전주교육대학교 터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전주남초등학교 동남편 학봉리 뒷산의 학봉이 그것이다. 서학동은, 조선시대에 전주교대부속초등학교 일대는 예전에 활을 쏘던 사정(射亭), 읍양정(揖讓亭)이 있어서 사정리(射亭里)라 불렸다가 일제 강점기에 지금의 서학동 파출소 자리에‘파수맥이’즉 경찰서가 있어서 서정(署町)이라 불리다가 해방 후 동명 변경(1946년) 때 서학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서학동은 동서학동과 서서학동으로 나뉘어 있는데 동서학동에는 노루목재, 좁은목, 산성리, 반석리가 있었고 서서학동에는 학봉리, 흑석골, 사정물 등이 있었다. 현재 서학로 중심에 전주교육대학교가 있고 주변에 전주교대부속초등학교와 전라북도산림환경연구소, 그리고 남고산성으로 가는 길목이 있어서 학교 주변이 활기차 보이고 자연과 가까이 할 수 있는 녹지공간에 인접해 있어서 학이 깃들만 한 공간이 되어 가는 듯하다. 그러나 학봉과 전주교대 뒤 산록을 잘라 도로가 개설되고 있어서 전주교육대학을 비롯한 인근 마을들이 도로를 우러러보며 살아야 할 형편이 되어 황학의 인재들이 깃들 학봉의 품이 훼손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2) 공수내로(길)
- 기점 : 서서학동 113-2
- 종점 : 서서학동 산 1-13

공수내로는 공수내다리에서 전주천서로에 이르는 공수내 복개도로를 말한다. 공수내는 남고산과 고덕산의 계곡물이 모여 흑석골로부터 내려와 전주천으로 합류되는 내를 말한다. 공수내(攻水)는 한자어 공수와 고유어 내가 합해져 이루어진 말로, 물살이 급하여 바윗돌과 부딪치며 흐르는 내를 의미하였다. 지금의 공수내 다리가 있는 길목에는 본래 다리가 없었다고 하는데 물이 많아지면 물살이 거세어서 건너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공수내는 이후에 인생의 허무함을 읊조리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공수래와 소리가 비슷한 까닭에 사람들 사이에서 공수내가 공수래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공수내다리가 장승백이를 넘어 전주부성에 들어서는 마지막 관문인 셈인데 남문밖장 부근에서 물건을 팔러 나온 이들이나 일품을 팔아 연명하는 이들이 고단한 하루를 접으며 집에 돌아가는 길목에서 인생이 본래 무상한 것임을 읊조리며 고통스러운 삶에 다소나마 위안을 얻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로 여겨진다. 흑석골에서 내려온 공수내는 곤지산 자락에 기대어 전주천으로 합류된다. 공수내는 현재 복개도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공수내로’는 바로 그 복개된 길에 붙여진 이름이다.

3) 흑석로(길)
- 기점 : 서서학동 293-1
- 종점 : 서서학동 994-2

흑석로는 공수내다리에서 흑석골에 이르는 길이다. ‘흑석로’는 동네 이름 흑석골에서 비롯되었는데 흑석골은 남쪽에 남고산과 고덕산의 봉우리들로 막혀 있고 남고산 자락과 고덕산 자락을 따라 형성된 산골짜기를 따라 깊숙이 들어앉은 동네이다. 흑석골이 외형상 산골짜기를 따라 깊숙이 들어앉은 동네이고 둘레가 높은 산으로 둘러 있어서 사람들의 내왕이 드물었을 것처럼 보이나 사실 이곳은 남고산을 넘어 구이, 평촌 등지로 드나드는 보광재와 남고산성으로 넘어가는 매봉재가 있어서 사람들의 내왕이 끊이지 않던 동네이다. 특히 보광재는 완주군 구이면과 임실군 신평면 주변의 사람들이 전주로 드나들던 주요 교통로이어서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러 다니던 시절에는 이곳에 달구지가 지나다닐 만큼 넓은 길이었다고 한다. 흑석골은 말 그대로 검은 빛깔의 돌이 많아서 지어진 이름이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이곳에는 탄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입지 조건이 좋아서 70년대 무렵까지만 해도 한지를 만드는 공장들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모두 팔복동 공업단지로 이전하여 예전의 공장 부지에는 폐허가 된 건물들만 남아있다. 예전에 전주 사람들은 이곳 흑석골로 소풍을 오곤 하였다고 한다. 매봉재에서 내리는 물은 벼락수를 이루고 보광재에서 내리는 물은 학두암을 지나 용천대라는 폭포로 떨어지는데 이 두 물이 이곳 흑석골에서 만난다. 그래서 이곳은 예전부터 물이 많고 풍광이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관음사 앞의 두무소(杜舞沼)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부관 두사청과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명나라 이여송의 막료 중에 당대 명유이며 천문지리에 해박한 두사청(杜思聽)이란 이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이곳 완산부성에 당도하여 산세를 보다가 명나라 중원의 서주와 흡사하다고 감탄하면서 서북쪽의 터진 곳이 있어 수적지지(授敵之地)의 형세이지만 남으로 뻗은 천혜의 요새지라고 경탄한 나머지 스스로 취해 덩실덩실 춤을 추었더니 장군의 말도, 하늘도, 땅도 한 몸이 되어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런 후로 사람들은 두사청이 진중을 떠나 자연에 취해 진중무(陣中舞)를 추었다고 해서 이곳을 두무소(杜舞沼)라고 불렀다고 한다(전주시지, 1997:120).

4) 천경로

천경로는 거산황궁맨션아파트 앞 삼거리에서 전주교대 교정과 기숙사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남천교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남고산(해발 265m)은 고덕산의 기운을 받은 산으로 산세가 가파르고 깊어 오래 전부터 산성을 쌓아 전주를 지키던 곳이다. 남고산성은 남고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그 능선에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가 있다.‘천경대, 만경대, 억경대’라는 이름은 각각 그곳에서 천 가지, 만 가지, 억 가지의 경치가 보이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런 이름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다만 만경대의 경우는 정몽주의 문집 포은집에 ‘망경대’로 기록되어 있다.

登全州望景臺歲在庚申。倭賊陷慶尙,全羅諸州。屯于智異山。從李元帥戰于雲峯。凱歌而還。道經完山。登此臺。(圃隱先生文集 2)

이는 정몽주가 이성계를 따라 운봉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돌아오는 길에 ‘만경대’에 올랐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에서 ‘만경대’는‘망경대(望景臺)’즉 전망이 좋은 곳이라는 뜻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이후에 호사가들이‘망경대’로부터‘천, 만, 억경대’라는 이름을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천경로’라는 도로명은‘천경대, 만경대, 억경대’중‘천경대’로부터 비롯된 이름이다.

5) 남고산성길

남고산성길은 완산경찰서 서학치안센터 앞 남고천을 따라 남고산성에 이르는 길이다. 남고산성은 사적 제294호로 901년 견훤이 축성하여 견훤산성이라고도 하였으며, 1811년(순조 11년)에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이곳에 남고진(南固鎭)을 두었는데 남고산의 주봉인 고덕산의 이름을 따서 고덕산성이라고도 불렸다. 남고진에는 산성별장 1명, 장관 22명, 군졸 1,340명이 상주하였으며, 화약, 활, 창, 군량미 등을 충분히 비축해 두었다고 한다. 고종8년(1871년)에 관찰사 이호준(李鎬俊)이 부남동 3리 반에 남관진(南關鎭)을 두어 남고산성 별장으로 겸관시키고 6개월 교대로 주둔하였다가 고종 32년(1895년)에 남고산성과 더불어 폐지되었다고 한다. 성 안에는 관성묘(關聖廟)와 남고사가 있으며 이 성은 남원, 순창 등지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남고산성길’은 말 그대로 남고산성에 오르는 길이며 남고산성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남고산성길’에는 임진왜란 때 전주부성을 지켰던 충경공 이정란 장군의 사당, 삼경사, 남고사 등이 있다.

6) 학봉길

학봉길은 서학로의 남부모터스 앞 삼거리에서부터 전주남초등학교를 지나 신용고궁맨션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전주남초등학교를 지나 산자락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동네가 예전에 학봉리였다. 학봉길은 이 마을의 이름을 따서 생긴 도로 이름이다. 마을 이름이 학봉리인 것은 동네 뒷산이 학봉이기 때문이다. 학봉리 남쪽에는 학봉사라는 서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신중경, 이상진을 보시다가 후에 이정란을 추배하였다고 한다. 신중경의 이름은 신담(申湛, 1519~1595)이며 1552년(명종 7)에 식년문과에 급제, 정언, 전적, 부수찬, 군자감정, 충청도 관찰사, 홍문관 제학, 예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1592년 전주부윤이 되어 의병을 모아 왜적의 진격을 막았다고 한다. 이상진(李尙眞, 1614~1690)은 현종 때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 숙종 때 이조판서, 우의정, 중추부판사를 지내으며 1689년 기사환국으로 종성, 북청, 철원 등지로 유배되었다가 1695년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저서에는 만암유고가 있다.

7) 황학길

황학길은 서학로에서 전주교대 우체국과 교사교육센터 사이로 난 길을 말한다. 황학은 전주교육대학교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전주교육대학교는 전라북도 공립사범학교(1923년 5월 개교)가 모체이다. 전주사범학교(1936년), 국립 전북대학교 병설교육대학(1962년), 전북대학교에서 분리 2년제 국립 전주교육대학으로 개편(1963년)하였다가 4년제 교육대학으로 승격(1983년), 1993년 전주교육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른다.

8) 석불길

한국지명총람(12권 370쪽)에 따르면 석불리는 본래 전주군 부남면 지역으로 돌부처가 있어서 석불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석불리라는 이름이 행정명칭으로 불리는 것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구화리, 홍수리, 은송리, 묘동 각 일부와 난전면의 수창리 일부를 병합하여 석불리라 한 데서부터 비롯된다. 석불리라는 이름이 만들어지게 된 그 돌부처가 있는 마을은 미륵댕이다. 미륵댕이에 있는 미륵불은 70년대 까지만해도 가슴 정도까지 묻혀 있었는데 심묘순 할머니가 그곳에 미륵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 석불과 관련하여는 이두리 설화가 전하고 있다.

옛날 잔전 땅에 이두리라고 하는 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비럭질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젊은 녀석이 동냥을 다니기도 창피하여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인근의 고달산 기슭을 서성거리는데 백발노인이 대여섯 발이 넘는 장죽을 들고 나타나 ‘어찌 너는 기진맥진한 몸으로 서성거리는고, 인생이 불쌍하여 한 가지 소원만 들어 주겠노라. 자자손손 영화를 누리길 바라느냐 아니면 당대 영화냐, 둘 중 하나만 말하라’하자 이두리는 서슴없이 ‘자자손손이 뭡니까, 우선 당장 배부터 원없이 채워보고 싶소이다.’라고 하니 이두리를 가엽게 쳐다보던 백발노인은 이두리 손을 꼭 잡고 한 곳에 이르러 죽장으로 땅방아를 찧으며 하는 말인즉 ‘이곳에 조상의 뼈를 묻으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두리는 그 날로 부친의 백골을 이장하였는데 몇 해 안 되어 당대의 갑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고달산(고덕산) 서쪽 기슭 비바람 속에 묻혀 있는 미륵불을 옮겨 세우되, 상체는 일월성신을 받게 하고 하체는 땅에 묻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노인의 현몽대로 했다. 일설에 의하면 괴목이 서 있는 옆구리를 뚫고 솟아났다고도 하는데 하여튼 이두리는 당대의 소원을 성취했고 미륵불은 노인의 현몽대로 옮겨졌다. 오늘날 서서학동 석불리 괴목나무 옆 미륵불이 바로 이두리 사연에 얽힌 미륵불이고 이두리의 무덤도 그 부근에 있다고 하여 미륵불골 또는 이두리골이라고도 불리고 있다.(전주시지 1997, 121쪽)

심요순 할머니에 따르면 미륵불은 그 후로도 영험한 징조를 나타냈는데 근처에 대명아파트를 지을 무렵에는 미륵불의 손과 발에서 피가 났다고 한다. 또한 미륵불의 발이 남문까지 뻗어 있었다고 하는데 남문에서 제를 지낼 때 초를 태웠더니 초가 남문 모양으로 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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