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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산주변의 동북부지역

제3부 건지산주변의 동․북부지역

발리산 지역

발리산 지역 이미지

1) 간납로(간납대길)

간납로는 간납대라는 정자의 명칭을 부여한 것으로, 간납대는 이흥발(1600-1672) 삼형제와 관련이 있다. 형 흥발과 아우 기발과 생발이 모두 장원급제를 하였는데, 정자 이름은 형 흥발이 사간(司諫)을 하고 동생 기발이 헌납(獻納)을 해서 관직의 마지막 글자를 하나씩 조합하여 간납(諫納)이라 한 것이다. 이흥발과 이기발은 조선 중기 병자호란시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을 향해 출정한 충신으로 삼천동과 송천동에 충신정려각이 전한다.

간납대는 발이산 북쪽 지금의 남노송동에 위치하였는데 정확한 터를 추정하기가 어렵고 대략 카톨릭센타 동쪽부근에 있었다고 전한다.

2) 발리산로

발이산(發李山)은 발산(鉢山)이였던 산이름에 조선을 개국한 목조대왕 구거지가 있는 자만동이 아래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이(李)자를 삽입하고 발(發)자도 바꾸면서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산 아래에는 이태조의 고조부인 목조의 세거지임을 기념하는 목조대왕구거비가 있으며, 바로 오목대로 뻗어내린 능선에는 오목대와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가 있다.

발이산 아래에는 목조대왕 세거지인 자만동이 있는데, 자만동이란 뜻도 자식들의 많이 불어나 가득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것이다. 발이산과 자만동 오목대와 태조의 주필유지비, 자만동과 목조대왕구지는 모두 조선왕조에서 뿌리가 전주임을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그래서 발이산 아래 자만동에는 신성한 곳이기에 이 지역에는 투장과 벌채 그리고 함부로 산을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 자만동금표를 세워 발이산을 보호하였던 것이다. 자만동금표는 발이산 아래에 지금까지도 마을주민들에 의하여 잘 보관되고 있다.

3) 자만동길

자만동길은 목조대왕 구거지(탄생지)로 조선왕조 발상지임을 지칭하기에 붙여진 길이름이다. 전주읍지에 이르기를 “전주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발산(鉢山)은 발산(發山), 또는 발리산(發李山)이라고 이른다. 발리산 남쪽 아래에 자만동(滋滿洞 : 現 校洞)이 있었는데, 이 자만동에 목조대왕의 집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완산지(完山誌)에 의하면 목조가 “전주에 살던 유년 시절, 수백 년 묵은 고목나무인 장군수(將軍樹)를 둘러싸고 여러 아이들과 진법(陣法)을 익혔다.”라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 오목대 동쪽 발리산 아래에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가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최근 2009년도 전주문화원에 조사된 자만동금표(자만동금표)라 써진 금표가 자만동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4) 옥류길

옥류동은 흔히 옥류동 고개라 하여 낙수정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더 잘 알려진 마을이다. 옥류동에는 옥류천이라는 샘이 있었다는데, 샘물이 아주 맑았다고 하며 주로 이 물을 이용하여 콩남루을 재배하여 전주 음식이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로 콩나물 재배는 옥류동 고개 넘어 낙수정 부근에서도 많이 재배했다고 전한다.

옥류동 들어가는 입구에는 월담 최담유허비가 있으며 바로 옆에는 참의정이라는 우물터가 있다. 유허비 뒤에는 조선후기의 3대 명필인 창암 이삼만선생 구거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옥류동을 뜻하는 옥류암(玉流巖)이라 쓴 암각서가 있었으나 지금은 땅속에 묻혀 찾을 수 없다. 창암의 암각서가 현재 많이 남아 있는데 백화담, 풍수, 취리건곤 한중일월 등이 남아 있고 영구음천(靈龜飮泉), 연비어약(鳶飛魚躍) 등이 유실되어 정밀조사가 필요한 상태이다.

옥류동은 국군묘지 길을 내면서 원형이 파괴되어 옛 정취를 느낄 수 없지만 전주의 최학자였던 금재 최병심이 염수당을 짓고 후학을 길렸던 곳이며, 지금도 금재의 묘소와 사당이 전하고 있는 곳이다.

5) 낙수정길

낙수정(樂壽亭)은 향교골 동쪽에 있는 정자 터로 전하나 지금은 정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낙수정국군묘지가 현판이 한문으로 적혀있어 낙수정이 이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낙수정은 동고산성 성황사에 물줄기가 발현하여 이곳에 와서 물이 응집되어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 이 지역에서도 많은 콩나물을 예전에는 재배했다고 전한다.

이곳에서는 범종이 발견되어 전 낙수정 동종이라 하여 보물 제1325호로 지정되어 국집전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범종은 일본인 다까하라 히미꼬 여사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소장해 오던 중 1999년 11월 국립문화재연구소를 통해 기증·반환한 것으로,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의 훼손이 있기는 하나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곳 지형은 발이산을 두고 남쪽으로 자만동과 옥류동이 자리하고 반대편 낙수정과 간납대가 있다. 이곳은 동고산성을 가는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6) 관선길

남노송동은 기린봉 자락이 기린로를 향해 뻗어 내린 간납대와 기린봉 아래 참나무정 마을 사이에 형성되었다. 참나무정에는 한뎃시암이 있었고,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이 매우 좋아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사용하였다. 즉 참나무정이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이 남노송동 앞으로 흐르게 되었다. 여기서 관선교나 관선암(觀善庵)이라는 지명이 개천이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관선암은 1930년대 전주지도를 보면 참나무정이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관선교는 풍남동과 남노송동을 넘어오는 철길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이 개천은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관선암은 비록 암자의 이름에서 왔지만 선을 실천하고 본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종교적인 것을 떠나 인간이 선을 추구하는 정신이 중요하여 도로명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7) 마당재길

전주부성에서 외각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으로는 마당재와 서낭댕이고개 무랑멀 옆길 등 세방향의 길목이 있었다. 마당재는 전주부성 동문에서 인봉리 앞길을 거쳐 방죽목, 구충목, 한범리를 거쳐 왜막실과 행치리로 가는 길목이었다.

동네 이름으로서의 마당재는 웃마당재와 아랫마당재 혹은 작은마당재와 큰마당재로 나누었다. 웃마당재와 혹은 작은마당재는 기린봉 밑 지금의 기린봉 아파트 북쪽으로 형성된 마을이며, 아랫마당재 혹은 큰마당재는 인봉리쪽으로 내려선 마을이다. 마당재에서 동네가 생긴 것은 해방 후이 일이라고 한다. 이곳이 마당재라는 지명을 갖게 된 것은 지형상 평평해서 나무꾼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쉼터로 이용하였고, 또 고려시대 팔관회 때 선린사의 스님들이 이곳에 야단을 설치하여 설법한 데에서도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8) 바람쇄는길

바람쐬는길은 한벽당에서 전주시자연생태박물관과 승암사 앞의 천변을 따라 물길을 올라간다. 치명자산 주차장을 통과하여 각시바위와 애기바위 전설이 있는 곳을 지나면 색장동 마을에 이르는 길이다.

한벽당은 뒤쪽으로 옛 철도길이 천변길로 변했는데 가끔 차량이 통행하지만 사람들이 한가롭게 산책하며 자연생태를 관찰할 수 있는 박물관 및 갈대 그리고 다양한 불교와 천주교 그리고 전설이 살아 있는 곳이다.

한벽당은 월당 최당의 정자로 바로 옆에는 달을 바라보는 요월대가 있으며, 요월대에서 승암마을 쪽으로 바위길을 지나가면 심매경(尋梅逕)이란 암각서가 있다. 이 심매경이란 말은 무릉도원에 피는 매화꽃을 찾아 나서는 아주 작은 소로길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바람을 쏘이면서 매화꽃을 찾아 나서는 한가로움에서 길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심매경에서 조금 나오면 철길의 흔적인 터널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자연생태박물관이 나온다.

전주자연생태박물관은 전주시 완산구 교동 한벽루 인근의 승암마을 전주천변에 위치하고 있다. 쉬리, 수달, 원앙이 서식하는 전주천의 청정한 물결을 앞에 두고,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 쉬리를 형상화한 건축물로 부지면적 18,766㎡, 연면적 2,075㎡의 2층 건물이다. 1층은 자연생태체험관으로 생태계의 개념과 쉬리 생태수족관, 전주 10경, 전주천에 서식하는 수달을 만날 수 있으며, 2층의 친환경 에너지체험관은 에너지영상실, 신에너지, 재생에너지, 자연에너지 등을 이해할 수 있는 23종의 체험시설물로 구성되어 있다.

또 박물관 앞 수변의 자연생태체험공원에는 물억새, 수크렁, 갯버들 등 야생화 120,505본을 식재하여 조성한 습지정화 및 수생식물 학습체험공간으로 자연과 생태환경을 생생히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자연학습장이다.

승암사는 전주시 완산구 교동 1가 945번지의 승암산 아래에 있다. 신라 헌강왕 2년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진묵 일옥 스님과 제자인 원응 스님은 이곳에 머물며 수도를 했다고 한다. 원웅스님은 진묵굴에서 수도 했는데, 그때 마셨던 물이 약수라서 절을 약수암. 또는 천수암이라 했다 한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절은 폐허가 되었고, 그 뒤 1740년(영조16)에 용담 조관스님이 중창했다.

근대에 와서는 1943년 만응이 주지로 부임하여, 1955년 봉수와 함께 한벽선원(寒碧禪院)과 승암강원(僧巖講院)을 세우고 이 지역 불교계에 선풍을 일으켰으며, 1983년 도광(道光)이 대웅보전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또 최근에 소장 불서 1건이 도유형문화재로서 지정되었다.

전주천을 따라 승암마을과 치명자산 주차장을 더 올라가면 승암산 남쪽 끝자락에 부딪혀 크게 굽이치면서 수심이 깊은 여울물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맑은 여울물 속에 아랫도리를 담근 채 다소곳이 서 있는 바위와 마주치게 된다. 이 바위가 바로 '각시바우'이고 여울에서 조금 비켜선 절벽에 자리잡고 있는 '서방바우'도 함께 만나볼 수가 있다.

아주 먼 옛날, 이 마을로 시집을 오게 된 신부가 있었다. 신부를 태운 꽃가마가 깊은 여울물을 옆에 낀 비좁은 산길을 따라 신행길을 재촉하던 도중 그만 가마꾼의 실수로 이끼에 뒤덮인 바위에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꽃가마가 절벽에서 굴러 떨어져 신부가 물에 빠져버렸다. 뒤따르던 신랑이 그걸 보고 신부를 구하려는 일념으로 물 속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신랑 신부는 물 속에서 한참을 허우적거리기만 하다가는 결국 둘 다 운명을 함께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후대 사람들은 각시바위와 서방바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함께 영원을 같이 했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올라가면 색장동이 나오는데 색장동 마을 중앙에는 당산나무가 있어 매년 고사를 지내고 있으며, 색장동은 명당이 많아 길지로 알려진 동네이다. 이 동네에는 전주의 거지왕이면서 독립운동가요. 성직자요, 만인의 우상이였던 이거두리묘소가 있는 곳이다.

반태산 지역

반태산 지역 이미지

1) 물왕멀로(길)
- 기점 : 중노송동483-1(전주고교)
- 종점 : 인후동1가 164-9

종광대 아래 전주고등학교와 전주동초등학교 사이의 마을이 물왕멀이다. 물왕멀은 물왕마을의 준말로 무랑물, 무랑말, 수왕촌(水王村엣) 등으로 불리웠다. 전에 마을 가운데 공동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맑고 맛이 좋았다고 한데서 물왕멀이라고 하였다. 또한 견훤이 이 물 좋은 곳에 도읍을 정하고 물왕멀의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궁궐을 지었으며, 도읍으로서 방어를 튼튼히 했던 데서 물왕멀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전주의 동부 지역은 모두 기린봉 자락들로 이어져 변변히 농사를 지을만한 땅이 없던데 비하여, 이곳 물왕멀 지역은 비교적 넓은 경작지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을의 규모나 위세가 컷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시대 철길을 내면서 천여개 이상이 땅속에 묻혔다고 한다. 아마도 물왕멀 지역을 구체적으로 조사한다면 후백제의 유물이 나올것이라 추정되며, 지금도 물왕멀 지역에선 후백제 시대의 와당 파편이 발견되고 있다.

물왕멀이 도읍의 본궁에 해당한다면 동고산성은 그야말로 산성에 해당되어, 이 물왕멀과 동고산성이 하나의 결합체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즉 견훤은 물왕멀의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궁궐을 짓고 성곽을 쌓았을 것이다.

2) 견훤왕궁로(길)
- 기점 : 중노송동 774-12
- 종점 : 인후동2가 1529-1
- 길이 : 총 2,901m
  • 유래 및 의의
    견훤왕궁로는 병무청오거리에서 기자촌과 서낭당을 통과하여 모래내시장쪽 새로난 도로를 향해 간다. 완주교육청과 전주여고 그리고 전일여중, 동북초등학교를 지나면 인후동이 나오고 연평도해물찜에 도착한다.
    견훤왕궁로라 명명한 것은 견훤의 왕궁이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인데, 즉 좁게는 물왕머리지역이고 넓게는 동초등학교가 있는 일제시대 동정리지역과 반대산지역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물왕멀은 왕이 먹는 물을 함축한 뜻으로 사료되며 즉 좋은 물이 있어야 많은 군사들과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왕궁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견훤은 서기 900년에 이곳에 후백제를 세우고 왕궁터를 잡았다고 전해온다. 지금도 동초등학교 주변에는 후백제의 기와편들이 나오고 있다. 또 일제시대 전라선을 만들면서 물왕멀 지역에서 수거된 주춧돌을 대량 집어넣어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물왕멀지역은 후백제의 왕궁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동고산성은 산성으로써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성황당 주변
    성황당은 전주시내에서 고산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로 현재는 노송이 한그루 있는 지역이다. 동초등학교 있는 높은 산이 반태산(또는 반태미, 혹은 반대산)이라 하는데 이곳을 경계삼아 앞쪽으로 형성된 것이 견훤 왕궁지역으로 가정해 본다. 전 전영래 박사는 고증을 통해 반태산과 물왕멀 일대의 토성지가 견훤의 왕궁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예부터 전주 사람들에게 그 곳은 견훤이 쌓은 토성지로 전해져 오기도 했으려니와 그 곳에서 출토된 연화문와당 그리고 물왕멀 일대 민가 건물에 현존하는 1만여 개의 각형석재들이 왕궁지임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된다.
  • 완주교육청과 모래내 시장 주변
    완주교육청 주변에는 모래내시장과 국립농산물검사소 그리고 생명과학고와 전라북도교육청 소속인 정보과학원이 위치하고 있다. 모래내시장은 멀리 고산과 진안, 장수지역에서 찾아오며 가깝게는 우아와 인후동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완주교육청 근방에는 전주여고, 전일여중, 동북초등학교, 전주생명과학고 등이 있으며, 전북대학병원쪽으로는 큰 건물이 없고 주택들 밀집지역이다.
  • 견훤왕궁길
    견훤왕궁길은 전주고등학교와 전주동초등학교 사이에 동에서 서로 난 길 이름이다. 서낭당에서 서쪽으로 난 오르막길로 올라가면 전주동초등학교 정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솟은 산이 종광대(鐘廣臺)이다. 종광대는 후백제 시대에 이곳에 종이 있었던 자리이며 후에 그 곳에 대를 지었는데, 그 대의 이름이 종광대이었다고 한다. 종광대의 남쪽 물왕멀이 후백제 견훤의 왕궁터의 중심지였고 바로 옆인 동초등학교 앞 부분도 남쪽을 바라보고 뒤쪽은 북쪽 바람을 막아주어 산성으로서 지리적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지역이라 하겠다. 이 지역은 일제시대 동정리라 불렸으며 전주이씨들이 살았던 곳이다.
3) 반태산길

반태산은 조선시대 여단터가 있었던 자리로 후에 교도소가 자리한 지역이다. 이곳 반대산(盤擡山)은 반다뫼, 반대묘, 반대미 등으로 불리고 있으며, 지금은 민가가 있어서 산으로 잘 느껴지지 않지만 예전은 상당히 산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 이곳의 여단터는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기린봉 밑의 성황사에서 제신을 모셔와 이 장소에 안치하고, 좌우에 여귀를 배열하여 전염병이 들어오면 수시로 제사를 지내 전주의 안녕을 빌었던 곳이다.

4) 반촌로(길)
- 기점 : 서노송동 663-1
- 종점 : 인후동1가 686

모래내시장에서 건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진밭뜰이 나오는데, 이곳은 종광대에서 뻗어내린 산자락 끝에 반대산이 자리잡고 있다. 반대산 밑은 원래 구형무소가 있었던 자리인데, 형무소가 문정리로 이사가면서 이곳에 60년대 말에서 70년대(72년이전) 초반에 반촌이라는 마을이 형성되었다. 반촌은 정부 주도의 택지 개발로 인하여, 부유한 사람들이 이곳에 입주하여 살았던 마을이다. 반촌은 반대산의 반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택지개발 이후에 새로 만들어진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

구형무소가 있던 자리이며 택지개발이후 주민투표로 반촌이라는 마을명칭을 사용하게 됨

인봉 지역

인봉 지역 이미지

1) 인봉로(인봉남로, 인봉북로, 길)
- 기점 : 중노송동 223-30
- 종점 : 인후동1가859-1

조선시대 전주부성에서 마당재를 가다보면 북동쪽으로 자리한 동네가 인봉리다. 인봉리는 마을 쪽으로 뻗은 기린봉 자락이 북서쪽으로 휘감아 돌며, 서낭댕이·종광대·반대산으로 이어지는데, 기린봉의 가장 안쪽 산자락에 안긴 동네이다. 인봉리라는 지명도 기린봉의 인봉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인봉을 사용한 지명은 인봉리방죽, 인봉서원, 인봉리 등이다. 지금도 인봉리를 사용한 인봉초등학교가 있다.

조선시대 규장각본 전주지도를 보면 인봉서원이 잘 표시되어 있어 상당히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2) 팽나무길

팽나무길은 도당산에서 검암산으로 연결되는 산맥의 중간부분으로 옛부터 나무가 많았고 아주 엄청난 크기의 팽나무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팽나무는 없어지고 지금은 그 자리에 아담한 팽나무가 서 있으며 바로 앞집에는 팽나무수퍼가 자리하고 있다. 팽나무는 다른 나무와 틀리게 목재로는 쓰이지 않지만 마을 입구에 심어 당산목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나무가 단단하고 가을이면 잎이 노란게 물들어 경관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일품이다.

3) 인후길

인후라는 말은 기린봉의 뒤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즉 기린봉에서 건지산으로 지맥이 연결되는 중간부분에 위치한 마을이다. 비록 큰 산이 있지는 않지만 연결적 역할을 하는 지역에 해당하므로 건지산의 조경단이 온전하게 보전될려면 인후의 역할을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인후길은 건산길이 지나가다 진밭들 있는 부분에서 동남수정아파트와 동남유정맨션이 위치한 지역을 말한다. 대부분 큰 건물은 없고 단독주택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4) 문화길

인봉리방죽은 인봉리와 물왕멀에 사는 사람들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들었으나, 택지개발로 인하여 쓸모없게 되자 방죽을 매립하여 1949년 경마장과 공설운동장을 만들었다. 60년대에는 경마장과 공설운동장에서 각종 행사 및 체육행사가 많이 벌어져 각종 행사사진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70년대 들어서 택지개발로 인하여 마을이 생겼는데 문화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문화촌이란 새로운 주거환경과 새로운 정신문화가 꽃피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길 이름이다.

금암 지역

금암 지역 이미지

1) 건산로(길)
- 기점 : 금암동 500-23
- 종점 : 산정동 875-6
  • 유래 및 의의
    건산로는 시작점이 건산천을 올라 가면서 복개공사한 도로에 붙여진 이름이다. 건산로 밑에는 모래내가 흐르고 있는데 이것을 한문으로 표현하면 사천이 된다. 또 금암동의 옛 이름인 검암천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즉 모래내는 인후동 남쪽 기린봉에서 발원하여 가재미골짜기를 타고 흘러 내리다가, 안골과 도덕골 사이로 흘러내리며 모래내를 이루어 건산로 밑으로 흘러들어 간다. 모래내는 전주천과 삼천 그 다음으로 중요한 하천으로 시작지점은 가재미골에서 작은 물줄기를 이루다 안골을 지나, 검암 앞을 흐르면서 검암천이 되고 그 사이에 진밭뜰이 있었다. 조금 내려오면 하얀 모래가 많아 붙여진 모래내가 있었다.
    건산로는 한교학원이 있는 지역에서 시작하여 복개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구불구불하게 올라가다 남쪽으로 꺾어지면 모래내시장이 나오고, 진밭뜰을 거쳐 직진하면 노동청청사가 나오며 조금 내려가 아중천을 지나면 동부대로에 연결되는 도로이다.
  • 전자상가와 모래내시장
    건산로가 시작되는 지점은 진북동과 금암동이 맞물려 있 지역으로 기린로쪽으로는 전자상가가 형성되어 각종 컴퓨터관련 제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금암동쪽으로는 도당산에서 뻣어내린 산줄기가 내려오다 멈춘곳이다. 이곳에는 KBS전주방송과 교통방송이 자리하고 있으며 바로 위쪽으로 구암정과 거북바위가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모래내시장은 금암동과 인후동 그리고 진북동 주민이 애용하지만, 사실은 진안, 장수, 고산, 봉동, 소양지역과 버스 및 교통이 연결되어 있어 서로 물물교환하는 장소가 되고 있어 항상 신선한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 SK한흥주유소 주변
    SK한흥주유소 주변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건산로가 지나가고 남북으로는 병무청 앞에서 서낭당을 지나 직진하여 고산 방면으로 가는 길로써 옛 구길에 해당한다. SK한흥주유소 주변에는 동진아파트가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가면 견훤로와 마주치는데 이곳 4거리에는 전자랜드 21인후점과 LG전자 서비스센터, 송동물의료센터가 동북쪽으로는 기린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 노동청사 주변
    노동청사 주변은 기린봉에서 건지산으로 이어지는 산능성이 지나가는 지역으로 약간 두두룩하게 지형이 높은 지역이다. 노동청사에서 서쪽으로는 전주잉글리쉬센터가 있으며 바로 밑의 쪽으로는 가재미길이 있고, 동쪽으로는 아중천이 지나가며 아중교를 넘어가면 모텔촌이 형성돼 있다.
  • 건산길
    건산길은 건산로가 시작하는 한교학원(구한진고속버스) 자리에서 모래내시장쪽으로 복개천을 따라 가면서 진북동우체국 쪽으로 위치한 지역을 말하고 있다. 이곳은 큰 건물을 없고 주택들과 간간히 작은 상점들이 운영되고 있으며, 건산길 중앙으로는 권삼득로가 지나가고 있다.
2) 모래내길

모래내는 인후동의 도당산과 선린사 사이에서 물길은 따라 내려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모래내는 원래 사천(沙川)으로 부르다가 쉽게 우리말로 부르게 되었고, 이곳은 교통의 요지로 전주시 북동부지역 주민들의 필요에 의해 1975년 시장이 형성되었다. 모래내길은 모래내시장을 주축으로 길이름이 형성되었으며, 주로 시장 통로가 형성되어 있는 곳에 붙여진 이름이다.

3) 작은모래내길

작은모래내길은 모래내시장 앞쪽으로 안덕원로가 지나가는데, 바로 큰길 남쪽 지역에 위치한 길이름이다. 작은모래내길은 고려내과의원에서 전주생명과학고교(구 농림고교) 앞까지 인데, 예전에 고산으로 가는 일부 도로가 확장개설되면서 모래내다리가 하나 더 놓이게 됨으로써 이전에 있던 다리가 작은모래내다리라 붙여지면서 명칭이 생기되 되었다. 작은모래내길은 모래내시장쪽으로 안덕원로가 지나가는 큰도로에는 병원 및 대형건물이 있으며, 약간 안쪽으로는 주택과 상점들이 있다.

4) 거북바우로(길)
- 기점 : 금암동 179-47
- 종점 : 우아동 3가 749-67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으며 바로 뒤쪽에는 새로 복원된 귀암정(龜巖亭)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칼바위가 많아 일명 ‛검암(劍巖)’으로 불리고 금암동이라는 동명(洞名)도 여기서 유래한다. 구릉지대에 위치하며, 고지도에는 이 거북바위 앞에 현무지(玄武池)라는 연못이 표기되어 있다.

돌거북이는 재질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몸통은 두툼하며, 약간 산을 타고 올라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고대국가에서 왕릉과 성터는 사신신앙(四神信仰)에 입각해 위치를 잡는다. 즉 동청룡(東靑龍), 서백호(西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는 왕권의 상징이면서 사방수호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의미에서 북쪽에 있는 금암동 거북이는 전주를 수호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 도로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금암동 거성타워아파트에서 우아동 위브어울림아파트 북쪽으로 연결되는 도로로, 인근의 거북바우를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거북바우는 금암동 거성타워아파트 바로 앞쪽에 돌거북이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5) 매봉로(길)
- 기점 : 금암동 1573-30
- 종점 : 금암동 1588-1

매봉길은 안골 도당산에서 뻗어내린 산자락이 전주생명고등학교 뒷산인 홀아비날 등을 지나 현KBS방송국 칼바위로 오는 사이로 산 능선을 이름하여 매봉산 또는 매봉재라고 부른다. 한국지명총람 전북편을 보면 매봉산은 구암 북동쪽에 있는 산으로, 산 밑에 복치혈(복치혈)이 있으며 응봉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산은 현재 전주 시립도서관에서 북부시장 사이에 있던 산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매봉로와 매봉길은 금암중앙하이츠를 중앙으로 전주 KBS방송국과 전주교통방송국 그리고 두산그랜드와 동남장미아파트 등이 위치하고 있다.

6) 금암길

금암지역은 도당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매봉을 거쳐 현재 KBS가 있는 금암산까지 연결된다. 이곳은 많은 칼바위가 있어서 검암(劍岩)이라 불렀고, 속칭으로는 칼바위, 검암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금암길은 전주금암초등학교와 금암1동주민센터가 있는 지역으로 큰건물로는 전북은행과 전북일보 등이 위치한 곳이다.

7) 삼송길

삼송의 명칭은 삼형제소나무의 축약된 단어로, 현 전북대 동쪽으로 난 지하보도 입구에 있었다. 삼형제소나무는 원래 한 나무에서 세 가지가 형제처럼 모여 있다는 설도 있고, 또 세 그루 소나무가 한 줄기처럼 자라 마치 형제처럼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삼형제소나무는 서낭목과 같은 역할을 했는데, 옛날에는 그곳에 고사떡을 갖다 놓고 고사를 지내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삼송길 지역에는 전북대 정문과 동문이 위치하고 있으며, 동문쪽으로 많은 복사집과 편의시설이 있다. 이곳에는 전주덕진소방서와 덕진노인복지센터가 있으며, 전북대학병원 입구쪽으로는 많은 병원과 양국이 있다.

명주 지역

명주 지역 이미지

1) 견훤로
- 기점 : 교동산7-22
- 종점 : 우아동3가 588-1
  • 유래 및 의의
    견훤로는 전주시 교동 한벽당 옆 옥류동에서 시작하여 전주최씨 최병심묘소와 사당을 거쳐 노루목에 있는 무애사를 거쳐 기린봉아파트앞으로 연결되는 도로인데 현재는 도로가 나 있지 않고 구도로만 있다. 또 기린봉아파트에서 전주시평생학습센터를 거쳐 안골광장과 명주골네거리를 거쳐 직진하면 기린중학교에 다다르는 길이다.
    견훤로는 견훤이 낙수정을 통과하여 동고산성에 이르는 길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견훤은 후백제의 부흥을 일으키고자 동고산성(전라북도 기념물 제44호)을 축성하고 건물을 지었다. 동고산성이 자리한 승암산 중턱에 견훤의 후백제 도성터가 발굴됐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주춧돌로 볼 때 전체가 188칸으로 고대 단일 건물 중 최대 규모이다. 특히 발굴 당시 출토된 연꽃무늬의 수막새와 암막새에는 전주성(全州城)이라 해서로 써진 글자는 견훤왕궁터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동고산성 견훤왕궁터 주변에는 많은 군사시설이 있었으며, 현재는 옛 성황사 자리에 사찰이 있으며 북문과 남문 등이 조사되어 많은 기와 파편을 찾아냈다. 즉 승암산의 동고산성은 견훤이 후백제 부흥을 위한 마지막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 옥류동과 낙수정 주변
    최담유허비는 한벽당 옆 옥류동 골짜기 들어가는 입구에 있으며, 1828년 성균관 제주 송치규가 찬하고 전면을 썼으며 후손 최설이 해서로 음기를 썼다. 비석의 재질은 백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글씨를 쓸 때 바로 비석위에 연필로 선을 긋고 쓴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최설이와 친교가 있는 한익상은 창암 이삼만과 같은 동시대에 살았으며 창암의 초기 호인 强齋(强翁)에 대하여 說한것이 있다. 최담유허비 옆에는 참의정이 있었고 구전에 의하면 바위에 글자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우물 흔적만 남아있어 아쉬움을 더한다. 바로 위는 창암 이삼만의 구거지로 생각되는 집터가 있다.
    창암이 구거지 주변에는 크게 쓴 영귀음천(靈龜飮泉), 연비어약(鳶飛魚躍)이란 8자 암각서가 있는데 하나는 거북이 바위 쓴 것이고 하나는 민들바위 썼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는 모두 유실되어 볼 수 없으니 아쉬움이 더한다. 집터 주변 바위에는 창암의 글씨인 백화담(百華潭) 취리건곤 한중일월(醉裏乾坤 閑中日月), 풍수(風水) 등이 있고 땅속에 묻힌 글자로는 , 옥류암(玉流巖) 등이 있었다 한다. 창암의 작품 간지에는 백화담, 옥류동, 계남산방 등이 많이 나오는데 이러한 것은 아마도 창암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글씨를 쓴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곳은 옥류동으로써 맑은 물을 이용하여 콩나물을 길렀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으며, 고개넘어 청수정 쪽에도 많은 사람들이 콩나물을 집에서 키웠다고 한다. 전주의 음식은 콩나물이 상당이 많이 들어가는 편이였고 임실의 쥐눈이콩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창암의 집터 근방에는 최담유허비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 근방에는 구한말 최학자인 금재 최병심이 살았다. 이곳은 금재가 염수당을 짓고 서당을 차려 학동들을 불러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교류를 했던 곳이다. 옥류동 상류지역에는 최병심묘소와 사당이 있다.
    노루목을 넘어 낙수정은 견훤성을 올라가는 길목으로 옛날에는 절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한 전낙수정 동종(보물 1325호)는 일본인 다까하라 히미꼬 여사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소장해 오던 중 1999년 11월 국립문화재연구소를 통해 기증·반환한 것이다. 종의 용뉴 부분이 약간 훼손이 있기는 하나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종의 윗면은 수평에 가까우며, 어깨부분인 상대와 맨 아래 부분인 하대에는 띠를 돌렸고 그 안쪽으로 반원무늬와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종에 새겨진 기록이 없어 종의 제작년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형태와 문양 및 성분비율 등을 살펴볼 때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 초에 제작된 범종으로 생각 된다. 낙수정은 국군묘지와 우물터가 있으며 노송천 상류지역에 해당되며 주로 주택들이 비좁게 밀집으로 조성되어 있다.
  • 인후동 주변
    인후동은 기린봉의 줄기가 뒤쪽으로 연결되어 건지산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옛날에는 인후동 쪽에는 인봉서원을 비롯하여 인봉저수지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일제시대 운동장이 되었다. 지금은 문화촌으로 변하였다.
    인후동지역은 교육문화와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전주시평생학습센터가 위치하고 있어, 지역문화의 허브역활을 담당하며 주민평생교육에 힘쓰고 있다. 전주시평생학습센터에서 약간 밑으로 내려가서 맞은편 용화사(龍華寺)에는 높이 2.7m의 석불입상이 위치하고 있다. 이 석불은 원래 몸 아랫부분이 땅 속에 묻혀 있었으나 복구하였고, 오른쪽 귀가 훼손되어 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칼로 쳤다는 전설이 전한다.
    안골4거리에는 하이마트와 인후1동사무소와 2층에는 인후문화의집이 거주하고 있어 안골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안골지역은 인후공원 바로 밑에 유일여고가 있으며 안골노인복지회관이 위치하고 있다.
  • 명주골4거리와 우아동 주변
    명주골4거리는 전주역으로 가는 백제대로와 만나는 지역으로 주변에는 사학연금빌딩과 홈플러스가 위치하고 있다. 명주골거리에서 고산쪽으로 가면 우아주공아파트와 동신초교, 우아중학교, 기린중학교 등이 위치하고 있다.
2) 명주길

명주골은 구 호남교회 사거리 근처에 있었던 마을로 명주베의 집산지라고 해서 명주골이라 전해오고 있다. 속칭 모래내는 아랫비단리, 명주골은 윗비단리라 부르기도 했다. 특히 선비들이 많이 모여 들어 일제 초기에는 마을 부근에 묘지를 만들어 이들의 해체를 꾀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직 후 명주골 주변에는 구호 주택인 숙사가 들어 섰다. 명주골은 1980년대 초반 시행됐던 6지구 개발로 인하여 자연마을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명주골은 금평초교와 동전주우체국이 자리하고 있으며, 대한지적공사 한국농촌공사등이 자리하고 있다.

3) 백동로(길)
- 기점 : 인후동2가 1562-4
- 종점 : 인후동2가 1572-3

완주군청 뒤 도천봉자락에 백동리가 있었으며 이곳은 조경단 앞을 지나 덕진연못으로 연결되는 지점이다. 이곳 도천봉 아래에는 백동제라는 저수지가 있어서 이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백동로는 완주군청과 한국전력공사가 있는 뒤쪽 길을 지칭하는데, 주로 주택단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 밑으로는 대우초원아파트가 위치하고 있다.

4) 심방죽로(길)
- 기점 : 인후동2가 593-2
- 종점 : 인후동2가 1581-7

심방죽은 안덕로와 옛 고산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 안쪽에 있으며, 검토요망(방죽자리에는 예전에 특무대(보안대)가 있었으며 현재 인후선변행복한 아파트가 있다)방죽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특무대가 있었다고 한다. 심씨들이 현재 전주생명과학고(구 전주농고)가 있는 논에 농사를 짓기 위하여 만들었다 하여 심방죽이다. 심방죽에서 인후아파트 쪽으로 길 주변에 생긴 마을은 방죽거리, 혹은 심방죽거리라 불렸다. 이곳은 해방 이후에 생긴 마을이다.

도당산 지역

도당산 지역 이미지

1) 도당산로(길)
- 기점 : 우아동 3가 749-57
- 종점 : 우아동 3가 752-1

도당산(陶唐山)은 기린봉에서 전주역까지 뻗어 내린 산줄기에 있는 산으로 2009년 인후공원으로 꾸며져 시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도당(陶唐)이란 말은 천자문에 등장하는데 아마도 도덕정치를 펼쳤던 요(堯)임금을 생각하면서 지은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산자락인 유일여고 뒷산에는 전주유씨 시조인 유습의 처인 삼한국대부인의 묘소가 있다. 부인 전주최씨는 다섯 아들과 사위 하나가 과거에 모두 급제하여, 자녀가 귀하게 되면 사후에 작위가 추봉되는 관례에 따라 여성최고의 작위를 받았다. 그의 장자 극감은 판사, 차남 극서는 직제학, 3남 극수는 판서, 4남 극제는 판관, 막내 극기는 판서, 사위 심효생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부군인 장령공 유습도 완산백의 작위가 내려졌다. 인후1동 산4-6번지 내곡에 재사(재실)인 시사재(時思齋)가 있다.

위브 어울림아파트 북쪽사거리에서 도당산 북쪽으로 나가는 지역에 있는 도로다. 도당산 북쪽지역임을 반영하여 도당산로란 명칭을 부여하였다.

2) 우아로(길)
- 기점 : 우아동 3가 746-30
- 종점 : 우아동 3가 743-148

우아동(牛牙洞)은 원래 완주군 초포면 우방리와 용진면 아중리․ 석소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1957년 전주시에 편입되면서 우방리와 아중리의 첫 자를 따서 우아동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아중리를 우아동 1가, 석소리를 우아동 2가, 우방리를 우아동 3가로 행정구역이 나뉘었다가, 1973년 우아동으로 통합되었다. 백제로가 끝나는 홈플러스(구 해금장 사거리)에서 전주역 앞 삼거리 좌측 부분에 해당하는 도로명이다.

우아를 사용하는 도로명은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밀집돼 있으며, 우아 주공1차아파트와 주공 2차아파트 단지가 있다. 주민편의시설로는 우아1동주민센터와 한국전기안전공사 등이 위치해 있으며, 학교로는 동신초등학교와 기린중학교가 있다.

3) 안골길

안골하면 모래내에서 도당산쪽으로 가다 움푹패인 골짜기를 안골이라 부른다. 도당산은 안골이 있어 안골산으로 불리며, 지금은 인후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안골에는 전주유씨 시조인 유습의 아내 삼한국대부인 묘소와 묘도비가 있으며, 들어가는 입구에는 150년이 넘은 유씨제각 시사재가 있다.

안골에는 인후1동주민센터와 인후문화의집이 지역 주민을 위한 문화예술 교육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안골사거리에서 명주골내거리로 넘어가는 달룽갯재 부근에는 북일초등학교가 있다.

4) 안덕원로(길)
- 기점 : 진북동1063-8
- 종점 : 산정동 855-2
  • 유래 및 의의
    안덕원로는 전주천변인 우진문화공간에 시작하여 전북교육회관을 거쳐 한국은행, 모래내시장, 전주생명과학고등학교, 안골을 거쳐 동부대로와 만나는 길까지다. 이 길은 김제방향에서 시내를 통과하여 진안 장수 방면을 갈 때 유연로와 안덕원로를 통과하면 가장 빠른길에 해당한다.
    안덕원은 기린봉에서 뻣어내린 산줄기가 인후동을 거쳐 진구렁에서 솟아 올라 도당산을 이룬 밑에 위치하고 있다. 도당산은 안골산 또는 건지산이라고도 하며, 지금은 인후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즉 도당산에서 지금의 인후도서관 쪽으로는 삼한국대부인의 묘소와 재실인 시사재가 있고 동쪽마을인 안덕원은 마을 뒷산(도당산)이 기러기 모양의 머리 부분에 해당된다는 안두원(雁頭院)이 변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규장각 소장본 완산지 역원조를 보면 안덕원은 부의 동쪽 10리 정도에 있으며, 상국 정언신의 구거지로 기록되어 있다. (安德院. 在府東十里. 有鄭相國彦信舊址)
  • <안덕원로 주변의 환경>
    ① 우진문화공간과 한국은행 주변
    진북이란 말은 북쪽의 차가운 바람과 허한 기운을 막기 위하여 숲을 조성하는 곳으로 전주가 평안하려면 진북의 역할을 잘 수행할 때 가능한 것이다.
    전주부성 옛 지도를 보면 진북동쪽에 숲정이를 조성하여 겨울에 불어오는 북서풍의 바람을 막았고, 비석거리를 조성하여 지기를 눌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안덕원로가 시작하는 진북동 주변에는 노블레스웨딩홀이 있어 각종 미술전시와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바로 옆에는 진북동사무소와 구MBC자리에 임페리얼예식장이 위치하고 있다.
    한국은행 주변은 구전북도교육청과 중앙중학교가 있으며 전북교육문화회관(학생회관)과 공연장에서는 각종 미술전시회와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② 모래내 시장 주변
    모래내시장은 뒤쪽으로는 금암이 우뚝 솟아 바람을 막아주고 앞에는 사천(砂川)이 흘러 많은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하여 자연스럽게 시장형성이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교통이 좋아 모래내 지역 인근인 평야부에서는 질좋은 쌀과 곡물류를 생산하고, 산간지역에서는 잡곡류 및 산채류가 모여들어 다양한 시장을 형성하였다.
    모래내 시장은 교통의 요지로 인근 진북동과 금암동, 인후동, 우아동, 호성동 뿐 만 아니라 완주의 봉동, 고산, 소양과 진안, 무주, 장수 지역에서 많은 물건을 구하기 위하여 모여드는 곳으로 전주시 북동부지역 주민들의 의해 1975년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모래내 시장 주변에는 전주의 북쪽을 지켜주는 거북바위(거북길)와 거북정이 있어 문화관광자원화 할 수 있는 자양분이 있다.
    모래내시장 주변은 전주생명과학고와 전주여고 그리고 국립농산물검사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전주역으로 가는 심방죽로길이 있다.

    ③. 안덕원 주변
    안덕원주변에는 아중저수지에서 소양천으로 들어가는 아중천이 있으며, 안덕원에는 송씨정려각이 있다. 약간 큰 길에서 들어가기가 오목한 지형을 하고 있지만 서쪽으로 산이 있어 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안덕원은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고 개전 20일 만에 파죽지세로 한양을 함락하고 이어 6월말 소조천 융경은 호남의 금산지역을 점령한 후 용담·진안을 거쳐 전라감영인 전주로 향할 때 이곳에서 조선군에 패한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5) 신기길

신기(新基)는 한국지명총람을 보면 안덕원 북쪽에 있는 마을로 백동리에서 살다가 주거환경이 변하여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 한다.

전주역광장 남쪽에 구 대한통운마트 옆에서 동성자동차운전학원 입구에 있는 길로, 예전의 지명인 초곡면 신기리에서 따온 명칭을 부여하였다.

6) 반암길

반암(盤岩)은 안덕원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중앙에 약 3평 정도의 넓은 반석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쉽게도 현재는 볼 수 없게 되었으며, 예부터 사용하던 마을 이름인 반암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동부우회도로 럭키아파트 건너편으로 동성자동차운전학원 입구에서 아중천 좌안도로 구간에 있는 도로이다.

7) 장재길(장재안길)

장재마을은 전주역 뒤편에 있는 마을로, 예전의 지명인 초곡면 장재리에서 따온 명칭을 부여하였다. 장재마을에는 예전에 대나무살을 이용하여 지우산을 만드는 수공업이 발달하였으며, 나중에는 비니루를 이용하여 비니루우산을 대량 만들었던 마을이다.

장재마을 뒤편으로는 소양천이 흐르고 있으며 주로 논이 많아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특용작물을 많이 하고 있다.

아중 지역

아중 지역 이미지

1) 아중로(아중중앙로, 길)
- 기점 : 중노송동499-13
- 종점 : 우아동2가 934-6
  • 아중로는 홈플러스 완산지점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진안사거리를 통과하여 전주영상정보진흥원과 노송동주민센터를 거쳐 아중역에 이르는 도로이다.
    아중리는 크게 아중저수지가 있는 아래쪽은 아중리가 하고 위쪽은 왜망실로 본다. 왜망실 지역은 진묵조사와 관련된 일출암과 임진왜란과 관련된 마을전설이 남아 있는 지역으로 아직 도시개발이 덜 된 곳이다. 그렇지만 아중지구는 기린봉에서 선린사 바로 밑에서 도시개발이 이루어져 옛 산자락이었던 원한배미, 무삼이방죽, 구총목 등이 모두 개발로 인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버린 지역이다. 이 지역은 지금은 아중지구라 부르고 있으며 각종 편의시설과 음식점들이 많은 곳이다. 그리하여 아중로로 부르게 된 것이다.
  • 전주고등학교 노송동 주변
    노송동이라는 행정명칭은 191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전주고등학교 주변에 늙은 소나무가 많아 이곳을 노송리가 부른데서 연유하고, 또 전주고등학교 뒤쪽에 노송대가 있어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전주고등학교 바로 앞은 권삼득로가 시작하여 KBS전주방송국을 통과하여 도립국악원을 지나가는 지점이며, 주변에는 홈플러스 전주완산점이 있어 많은 유동인구가 있는 지역이다. 바로 주변에는 동물병원 및 동물들과 관련된 사료를 파는 곳이 있으며 학교는 풍남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풍남초등학교 앞 진안사거리 부근에서 약간 아중역 쪽으로 약간 올라가면 전북선거관리위원회가 있으며 바로 옆에 전주소프트웨어지원센터 및 전주영상정보진흥원이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문화촌이 나오는데, 원래는 인봉리방죽이 있었으며 이것을 공설운동장으로 만들었던 자리이다. 이곳 인봉저수지에는 기린봉에서 흘러내는 계곡물이 흥건하게 고였으며, 주변에는 오래된 정자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어 여름철 피서처로는 유명한 곳이 였다. 그런데 주변 택지개발로 인하여 인봉리방죽이 제기능을 잃자 이곳을 매립하고 경마장과 공설운동장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공설운동장도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운동장으로써 재기능을 다 했지만 1970년대 부터는 이곳이 택지로 개발되어 문화촌이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문화촌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노송동주민센터가 있으며 요즘 새로 지은 우성해오름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 아중지구와 아중역 주변
    아중지구는 대단위 아파트단지와 학교가 들어서 있다. 바로 기린봉 밑에 쪽으로는 아중 3차 5차 부영아파트와 아중마을 2차 제일아파트가 있으며, 길 건너 북쪽으로는 아중 6차 부영아파트와 아중 1차 제일아파트 등이 위치하고 있다. 학교로는 아중역 앞에 아중초등학교가 있으며, 아중 6차 부영아파트 부근에 전주중앙여자고등학교와 온고을중학교, 인봉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아중역 앞쪽 대로변에는 다양한 음식의 맛을 내는 음식점들이 많이 있으며, 숙박시설 및 휴식공간인 아중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선린사 올라가는 길에는 전라북도 국민체육선터와 아중체련공원이 있어 국민건강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2) 정언신로
- 기점 : 인후동1가 157-32
- 종점 : 우아동2가 926-1
- 길이 : 총 1,865m
  • 유래 및 의의
    정언신(鄭彦信:1527∼159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입부(立夫)이고 호는 나암(懶庵)이다. 그는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1571년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고, 그 뒤 전라도도사· 장령· 동부승지 등을 거쳤다. 그 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나가 변민(邊民)을 잘 다스리고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풍족하게 비축하였다. 이어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겼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으나, 서인 정철의 사주를 받은 대간이 정여립의 구촌되는 아저씨벌이 되었기 때문에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하여,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하게 되었다.
    그 후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고, 죽이라는 왕명까지 내렸으나 감형되었다.
  • 서낭당 주변
    서낭당 주변은 노송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반대산과 여단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지역은 일제시대 동정리라 하여 전주이씨 시중공파들의 문중 땅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원래 창암 이삼만과 음률로써 교유한 심씨부인의 묘소가 있었던 자리이다.
    서낭당은 지방에 따라 선왕당·천왕당·국수당·국시당 등으로 불리 웠고, 한자로는 성황당(城隍堂)이라고도 하였다. 서낭당은 보통 마을 어귀나 고개마루에 원뿔 모양으로 쌓은 돌무더기와 마을에서 신성시되는 나무(神樹) 또는 장승 등으로 이루어졌으나 전주 서낭당은 돌무더기는 보이지 않고 노송만 옛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우아2동 중상공원 주변
    중상공원 주변은 롯데아파트, 제일아파트, 꿈마을부영아파트, 아중현대아파트 등이 있으며, 학교는 인후초교와 온고을중학교 등이 위치하고 있다. 원래 택지가 개발되기 전에는 석소리와 진버들골이 위치하고 있던 지역이다.
    석소리(石所里)는 기린봉에서 인후동의 진구렁으로 이러지는 산자락의 동쪽 자락과 아중천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는 완주군 용진면 지역으로 1957년 우아동으로 통합되었다. 석소리는 1990년대 중반에 아중지구 택지개발로 인하여 옛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으며, 마을 근처에 석소의 명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석소리 앞에 있는 들에는 팥죽배미와 연방죽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여관이나, 노래방, 음식점 등이 들어서 있는 지역이다.
3) 중상보로
- 기점 : 우아동 2가 875-3
- 종점 : 우아동 2가 893-3

중상보는 아중천 중간 부분에 중상보를 막아 농업용수로 사용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상보길은 아중리 롯데아파트 북쪽 입구에서 아중중학교를 거쳐 아중천에 이르는 도로다. 학교는 아중중학교가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4) 한배미로(길)
- 기점 : 인후동1가 928-6
- 종점 : 우아동1가 1088-1

전주의 상징인 기린봉이 있고 바로 북쪽으로 선린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밑에 물탕골이 있어 물이 발원한다. 이 물탕골 바로 밑에는 조그만 마을이 하나 있는데, 이 마을이 한배미이다. 원래 한배미는 기린봉에서 아중저수지로 뻗어 내린 산 끝자락인 아중저수지 뚝 바로 밑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중저수지 밑에 위치한 한배미를 원한배미라 부른다. 한배미 사람들이 짓는 논으로 갈치꼬랭이와 가마배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갈치코랭이는 서마지기 되는 논인데 2미터 남짓한 폭으로 갈치처럼 길게 뻣어 생긴 이름이고, 가마배미는 현 부영3차아차트 정문 근처에 있었던 논을 부를 때 사용한 명칭이다. 즉 한배미는 기린봉의 선린사와 아중저수지 밑으로 형성된 논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한배미는 또 한범리하는 지명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모두 한배미나 한범리나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인교로(길)
- 기점 : 우아동 1가 1102-2
- 종점 : 우아동 1가 1088-7

인교(仁橋)은 문수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은행나무로 놓은 다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교로는 아중역 앞 아중부영5차아파트에서 아중저수지 밑으로 동부우회도로 안에 인접한 도로명이다.

인교명을 사용하는 도로에는 대부분 음식점 들이 많이 있으며, 학교로는 아중초등학교가 있다.

6) 석소로(길)
- 기점 : 인후동 1가 924-12
- 종점 : 우아동 2가 866-1

석소(石所)마을은 인후동 중심의 마을로 완주군 용진면이였는데, 1957년 전주시에 편입되어 우아동 2가가 되었다가 1973년 우아동으로 편입되었다. 기린봉에서 인후동 진구렁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의 동쪽자락과 아중천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는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아중택지개발로 옛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마을 근처에 석소의 명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마을 앞에 팥죽배미와 연방죽이 있었다고 전한다.

아중 부영아파트사거리에서 현 선덕1길에 이르는 오른편지역의 도로로, 옛 지명인 석소리를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7) 가재미로(동가재미, 서가매지, 길)
- 기점 : 인후동1가913-3)
- 종점 : 인후동1가 834-1

기린봉의 선린사 아랫 부분에 한배미가 형성되고 바로 옆에는 아홉기의 묘소가 있었다는 구총목이 있다. 구총목에서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실개천을 따라 내려가면 윗가재미, 가운뎃가재미를 지나 아랫가재미에 이르게 된다.

아랫가재미, 가운데가재미, 윗가재미를 통칭 가재미 혹은 개재미하고 하며, 가재미 뒷산에는 명당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지역 토박이들에 의하며 가장동(可葬洞), 가장리(可長里)라도고 불렸는데,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마을의 지형이 가재미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졌다고 전한다. 윗가재미는 현 온고을중학교가 있는 근처였다고 전한다.

풍수지리상가재미모양또는가재뫼,가재산,가장동,가장곡이구전되어가재미로불리었다고함

8) 무삼지로(길)
- 기점 : 인후동1가 916-6
- 종점 : 인후동1가 845-1

인봉초등학교에서 북쪽으로 온고을중학교와 인후3동우체국을 지나 박병암이비인후과에 이르는 길이다.

마당재를넘어한배미쪽으로가다보면마을이나오는데 마을옆방죽이름이'무삼이'방죽이었음 무삼이방죽 위쪽으로 무삼혈(舞杉穴)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속칭 밀가루방죽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밀가루방죽이란 6. 25가 끝난 후 이곳에서 방죽을 만들기 위한 부역을 하고 구호물자인 밀가루를 품삯대신 받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무삼이방죽 바로 밑에는 미나리를 재배하는 미나리깡이 있었고, 이 방죽물은 가재미골로 흘러 들어갔다하는데, 지금은 도시개발로 인하여 옛 흔적을 찾을 길이 없고 명칭만 남아 있을 뿐이다.

9) 구총목로
- 기점 : 인후동1가 886-9
- 종점 : 인후동1가 895-5

구총목(九塚목)은 구총항(九塚項), 굴총목이라고 다양하게 불렸으며, 가재미골짜기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는 한 자리에 아홉 기의 묘가 있었다고 전한다. 구총목은 마당재를 지나 한배미와 행치리 혹은 왜막실로 들어가는 길과 아랫가재미에서 가재미골짜기를 따라 오는 길이 만나는 지점에 형성되어 있던 마을이다.

구충목로는 인후3동주민센터와 전주시평생학습센터가 있는 지역에서 인후3동우체국에 이르는 구간이다.

10) 진버들길

석수리 서북쪽으로 진버들이라는 마을이 있어서, 이곳은 지금의 노동부종합청사가 들어선 길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다. 즉 아랫가재미에서 길게 뻣어 있는 골짜기가 진버들골짜기였다. 이 골짜기는 길게 형성되어 있으며 풍수지리학으로 볼 때 유지앵소혈(柳枝鶯巢穴)이라 하여 진버들 혹은 장유(長柳)라 불렀다. 이 길이 현재 노동부종합청사 앞을 지나 동부우회도로에 닿는 큰 길이다.

11) 산정길

아중천의 아중교에서 안덕교 구간 우안쪽으로 숙박시설이 형성되어 있는 지역이다. 법정동인 산정동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1973년 완주군 용진면 산정리의 일부를 우아동에 편입시키고 산정동으로 명명하였다.

12) 행치길

행치(行雉)마을은 꿩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행치길은 아중역 주차장 옆길로 들어가 동쪽으로 철길을 건너 형성된 마을이다. 즉 현 아중역 뒤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행치리에서 뒷산인 소리재를 넘어 금상동과 진안쪽으로 빠지는 중요한 길목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도로가 없어 산길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13) 아중천길

아중역에서 아중천 우안을 따라 아중교 까지의 오른쪽 지역에 난 도로로 아중천 인근지역임을 반영하여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완주군 상관과 경계인 묵방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침치천이 되어 왜망실을 거치고 아중저수지에 담긴다. 그리고 저수지에서 다시 흘러 아중천이란 이름을 얻고, 장재마을 앞에서 소양천에 합수된다. 왜망실은 왜막실이라고도 하는데,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마근대미재에 세워놓은 허수아비를 보고 군대로 속아, 그 곳을 피해 그 옆 골짜기로 넘어오다가 진을 치고 있던 우리군사에게 크게 패했다 한다. 그래서 왜망실이라 하였다 하며, 또 죽지 않고 살아난 왜구들이 지금의 용계리나 아하리에 숨어 들어가 막을 짓고 살았다 하여 왜막실로 불리었다 전한다.

<아중천변길>

아중천과 만나는 현 동부우회도로의 우아교에서 아중천의 천변을 따라 소양천과 합수되는 지점에 이르는 도로이다

아중천변길이 시작되는 부분은 아중골프연습장이 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논밭과 비닐하우스 재배단지가 이어지고 간간히 주택과 공장도 위치하고 있다.

왜망실 지역

왜망실 지역 이미지

1) 왜망실길

예부터 사용하던 지명인 왜망실을 길 이름으로 부여하였다. 임진왜란 때 잔류한 일본인들이 막을 짓고 숨어 살았다고 해서 왜막실, 또는 잔류한 일본인들이 그곳에서 죽었다고 해서 왜망실이라 하였다 한다.

왜망실은 진묵선사가 일출암에 머무를 때 한 여름에 어머니와 누님을 위하여 모기를 쫒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2) 아하마을길

왜망실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예부터 사용하던 마을 이름인 아하(牙下)를 길 이름으로 부여하였다. 아하마을은 아중저수지 물길을 따라 올라가 동쪽에 있는 마을로 조금 올라가면 용계마을이 있고 멀리 있는 산이 묵방산이고 바로 밑에는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3) 용계길

왜망실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예부터 사용하던 마을 이름인 용계(龍溪)를 길 이름으로 부여하였다. 용계마을은 아중저수지에서 물길을 따라 아하마을을 지나서 바로 붙어 있는 마을이다.

4) 재전길

왜망실골짜기의 가장 막바지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예부터 사용하던 마을 이름인 재전(在田)을 길 이름을 부여하였다. 골짜기 마을로 이름에서 보듯이 논농사 보다는 밭농사가 주를 이룸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재전휴게소와 그린가스설비가 있는 곳이다.

5) 아중저수지길

아중저수지 제방에서 우측으로 저수지 좌안의 상류에 있는 관암교까지 연결되는 길이다. 중간에 무릉과 관암을 거친다. 무릉은 문수골이라고도 하는데, 바위가 마치 문처럼 양옆으로 있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골짜기가 깊어서 가뭄에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다고 한다. 문수골에는 송원창과 송준호 부자의 효자비가 있다.

전주의 무릉도원은 아중저수지길을 따라 가면 한적한 무릉마을과 관암마을을 만날 수 있다.

6) 관암길

관암(冠岩)마을 뒷산에 갓을 쓴 형상의 바위가 있다고 해서, 갓바우· 관암이라고 하였다.

관암마을은 기린봉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중저수지 상류지역에 해당하는 곳이다. 마을 옆에는 동부우회도로가 인접해 있고 배산은 기린봉하여 안대는 왜막실을 보고 있다.

7) 신동길

예부터 사용하던 마을 이름인 신동(新洞)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신동마을에서 신을 신고, 관암마을에서 갓을 쓰고, 문수골에서 문을 열고 은행다리를 건너서 현 아중역 뒤인 행치리로 간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신동길 바로 앞에는 남원과 임실로 통하는 동부우회도로와 철도가 지나가고 있다.

금상 지역

금상 지역 이미지

1) 금상길

전주에서 진안 방향으로 전라선 굴다리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나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은 진안으로 나가는 구 도로로 진행하면 소리개재를 넘게 된다. 금상길은 이 구 도로에 부여한 명칭이다. 신구 길이 갈리는 곳은 예전에 잣나무가 무성했다 하여 백자동(柏子洞)으로 불리던 곳이다.

2) 수리재길

수리재길은 국도 26호인 진안선 금상교차로에서 금상동을 거쳐 수리재(수리개재)에 이르는 길로, 고개이름인 수리재를 길 이름으로 부여하였다. 이 재를 넘어오면 진안에서 전주로 들어가는데 즉 아중역 뒤의 행치마을에 이르게 된다.

3) 수곡길

예부터 사용하던 마을 이름인 수곡을 길 이름으로 부여하였다. 원금상 북편에 있는 마을이다. 수곡(水谷)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화재가 자주 나므로 어느 도사가 마을을 지나면서 수곡이라고 하면 불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한다.

4) 금하길

금하(今下)마을은 원금상마을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즉 원금상마을 아래에 있다하여 금하라고 한 것이다. 금하리는 원금상리를 거쳐 수리재를 넘어가는 길목이다.

금하리는 금상리와 관계가 있으며 회안대군 묘소 아래에 있는 마을임을 지명에서 나타내고 있다.

5) 원금상길

금상동(今上洞)은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인 회안대군 방간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그는 조선왕조의 창업에 힘을 보탰고, 1차 왕자의 난에 방원을 도와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여 정사공신이 되었다. 그 후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토산에 유배되었다. 이어 안산, 익주, 순천, 익주, 홍주로 배소를 옮기다가 말년에 본인의 원에 의하여 완주군 봉동읍 구만리 천래마을에 은거하게 된다. 그리고 1421년(세종3년) 홍주에서 병사하였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곳 묘소는 특이하게 회안대군 묘 앞에 그의 셋째부인인 금씨의 묘가 있는데, 이는 금씨부인이 죽어서도 회안대군에 가해지는 온갖 풍파를 앞에서 막겠다는 유언에 따라 세워졌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6) 산재마을길

산재마을은 금하에서 남동쪽으로 산을 향해 올라가면 마을이 나온다. 즉 원금상 동편에 있는 마을로 좌우에는 산으로 덮혀 있다. 마을에서 서쪽으로 작은 저수지가 있어서 마을 논을 적실 수 있으며, 예전에는 산제를 지냈던 곳이라고 전한다.

7) 가소길

가소(可所)마을은 금상동(법수메) 동쪽에 있는 마을로 금상교차로에서 진안쪽으로 세마교를 지나 바로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즉 예부터 사용하던 마을 이름인 가소를 길 이름으로 부여하였다.

8) 삼천공덕길

삼천공덕길은 삼천(三泉)마을과 공덕(孔德)마을의 명칭을 같이 반영하여 부여하였다. 공덕은 가소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고 삼천은 가소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삼천은 샘이 셋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지역은 전주시 금상동 중에서 완주군 소양면과 경계지역에 해당한다.

9) 원산정길(원산정안길)

산정동(山亭洞)은 본래 완주군 용진면 지역으로서 뒷산에 정자나무가 있었으므로 산정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행치리, 석소리를 병합하여 산정리라 하였다.

원상정은 백자삼거리에서 용진 하이리 쪽으로 가다 도로 우측에 있는 마을이다. 원상정은 산을 배산으로 삼고 앞에는 논이 많이 있다.

10) 삼거길

삼거마을 전주에서 진안으로 가는 금상교차로에서 다음 진입로로 들어가 지하차도를 통과하여 위치하고 있다. 즉 금상동 가소마을 북쪽에 해당하는데 큰도로 맞은편에 형성되어 있다. 이 삼거(三拒)마을은 예전의 완주군 용진면 금상리 지역으로 전주에서 소양을 갈 때 구도로에 형성된 마을이다. 현재는 신도로의 북편에 위치하고 있다.

호성 지역

호성 지역 이미지

1) 호성로(길)
- 기점 : 우아동 3가 602-62
- 종점 : 호성동 2가 638-21

호성로는 한촌 호성군 이주의 인물을 알리고자 한 도로명이다. 호성군 이주는 세조의 아들 덕원군 서(曙)의 증손으로 평안도 법흥사에서 사명당과 같이 병서와 무예를 연마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실과 전주지역에서 의병 3,000명을 모집하여 선조를 호종하였다. 이 후 평양성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일등으로 녹훈되어 철권을 받았으며, 호성군이란 작호를 받았다.

호성이란 도로명은 호성군 이주의 호국정신과 그의 선비정신을 기리고자 사용한 도로명이다.

2) 새논밭길

새논밭길은 호성네거리에서 부설 예원대학교 건물을 거쳐 약 180미터 정도 가서 우측길을 따라 소양천으로 가는 작은 길이다. 새논밭길을 따라 새로 논을 만들어서 새논뜰이라 하며, 이곳으로 난 길을 예전에는 새논질이라 하였다. 방죽안에서 새논질을 따라 북쪽으로 내려가면 텃골이다.

새논밭길은 새로 논과 밭을 거치면서 길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대학보길

호성동 배미실 입구인 호성동 들어가는 입구에서 소양천 대학보에 이르는 길이다. 소양천에는 높이 3m의 대학보가 설치되어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대학보길에는 민가가 거의 없고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는 지역이다.

4) 텃골길

동부우회대로 호성동아아파트 앞 LPG충전소에서 호성중학교에 이르는 길이다. 예부터 사용하던 마을 이름인 텃골을 길 이름으로 부여하였다. 텃골은 장구봉에서 대미봉을 거쳐 범바위로 뻗어 내린 산자락인데, 범바위 남쪽 작은 골에 자리 잡고 있다. 기동 또는 신정리로 불린다. 학교로는 호성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텃골을 텃밭이 있는 골짜기의 순수한 우리말로 좋은 밭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5) 배미실로(배미실안길)

배미실은 배매실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배를 매는 자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마을은 호성동 1가 중심에 있으며, 효부인 한씨의 정려가 있다. 배미실은 소양천을 따라 배가 이곳까지 왔음을 알 수 있고 바로 초포 또는 초곡면 등과 관련됨을 알 수 있다.

6) 소양천변로
- 기점 : 호성동2가 40-4
- 종점 : 종점: 전미동1가 233-1
  • 소양천변로는 소양천을 끼고 천변에 형성된 도로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양천은 완주군 소양면에서 발원한 물이 명덕교과 하이교를 지나 장재마을 부근에서 아중천을 흡수하여 흐른다. 소양천은 소양교를 지나면서 수량이 풍부해지고 회포대교지점에서 고산에서 내려오는 만경강을 만나 흡수된다.
    소양천변로는 고당네거리에서 출발하여 북쪽인 농은마을, 한촌마을, 신중마을, 하오마을을 거쳐 회포대교와 만나는 지점에서 끝난다. 한촌마을은 임진왜란시 한촌 이주가 전주와 임실지역에서 의병을 소집하여 선조가 피난하고 있던 의주까지 올라가서 알현했고, 평양성 전투에서 성을 탈환한 공로로 호성군에 봉했으며, 더불어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훈적을 받으면서 사패지를 하사한 땅이다. 지금도 농은마을과 호성동에는 사패지를 내렸던 표석이 3개 남아있다.
  • 농은과 한촌마을
    농은마을과 한촌마을은 전주이씨 호성군 이주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한촌마을은 원래 한사월이라 부르고 있으며 마을 이름도 호성군 이주가 사패지로 받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마을 안에는 호성군 이주의 후손인 영모당 이복화의 사당이 있는데, 이곳에서 태조영정이 하룻밤 이봉(移奉)된 이야기가 전한다. 1894년 갑오 동란시 전봉준이 선화당에 진군하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겁에 질려 달아날 궁리만 하다 면직되고, 후임으로 김학진은 부임 도중 전주의 동정만 살피다 삼례에서 머무적거렸다. 이때 김문현은 공주로 도망친 후 서울로 올라가 동학군의 실상을 보고했고, 판관 민영승은 관복을 벗어 던지고 처가인 호성동 한사월의 처남인 이연일 집으로 도망쳤다. 처남 이연일은 자형의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조경묘에 모셔져 있는 시조 위패와 경기전에 모셔져 있는 태조영정을 모시고 나와 하룻밤을 영모당에 임시 봉안하고 이튿날 민영승은 위패와 영정을 시봉하고 위봉산성 안에 있는 위봉사 대웅전에 이안했던 것이다.
    농은마을과 한촌마을은 호성군 이주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하룻밤 태조 영정을 봉안했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하오마을과 신중마을 주변
    하오리는 고산천과 소양천이 합수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하오마을과 신중마을은 소양천의 제방을 따라 들어서 있으며 바로 주변에는 논이 많이 있으며 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산은 멀리 오매마을 산이 보일 정도이며 바로 앞쪽으로는 용진면 상운리가 위치하고 있다.
7) 초당길

초당(草堂)은 정주리라고도 하는데, 고당네거리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조 영조 때 효행이 지극한 효자 강서린에게 나라에서 지행당이란 집을 지어 주었는데, 이를 마을사람들이 초당이라고 불렀고, 이런 연유로 초당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8) 지행당길

지행당은 조선후기에 학문과 도덕, 그리고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던 강서린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것이라 한다. 조선 영조 8년(1723) 전라감사 이수항의 건의에 따라 지행당(止行堂)이란 이름을 내려주고 나라에서 비용을 들여 건립하였다. 강서린의 아버지 강행우 역시 학덕이 높고 효행이 지극하여 효자동의 황강서원에 배향되었다. 지행은 조상의 어진 발자취를 길이길이 이어 가도록 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지행당 편액은 당시 공조판서인 이익회가 약간의 행기를 넣어 썼다.

9) 호성동산길

호성동 동산리(東山里)는 천마산의 동쪽 자락에 길게 늘어선 마을로 배미실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즉 천마산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하여 동산리라 하였다 한다. 동산리에는 장개논, 고리논, 양산배비, 숯굳배미, 큰새논, 작은새논 등이 있다. 호성동산길 앞에는 지행당이 위치하고 있다.

10) 사거리길

전주에서 봉동으로 가다 송양제2교 못 미쳐서 고당네거리에서 동쪽으로 가는 길이다. 북동으로 완주군 용진면, 남서쪽으로 전주, 동남쪽으로 우아동 장재, 서북쪽으로 호성동 화정리를 지나 전미동 전당리로 나가는 길이다.

사거리길은 고당네거리에서 산정타이어와 전주상사를 거쳐 마이산포그(삼거리)에 이르는 길이다.

11) 화정길(화정안길)

화정리(花亭里, 花丁里)는 범바위 남쪽에 있는 마을로 건지산 줄기인 대미봉에서 마치산으로 뻗은 산자락의 맨 첫 동네다. 화정리를 화암리라고 했을 때에는 화정리와 호암리를 합쳐 부르는 지명으로 옛날에는 두 동네를 한 동네로 보았다고 한다. 화정리는 풍수상 소의 형국으로 마을입구에 바위 두 개가 있는데, 그 바위가 소뿔로 마을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전해온다.

12) 고당길

고당(古堂)리는 농은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부터 마을에 오래된 집이 있어서 붙어진 이름이다. 전주시 차량등록사업소에서 용진 쪽 길목의 고당네거리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당마을은 고산으로 가는 구길에 놓여 있으며, 천변으로 가는 농은과 한촌마을의 초입이고, 초포초교로 들어가려면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가야 한다.

13) 봉암길

봉암리는 마치산의 동남쪽 자락에 있는 마을로, 부엉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연유로 봉바우·봉암이라 불렸고, 또 범바우·호암으로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사리·화암리·화정리·농은리·고당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봉암리라 해서 초포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57년 전주시에 편입되었다.

14) 농은길

농은마을은 고당리 북쪽 인접마을로 소양천 좌안 쪽 제방의 서쪽에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소양천을 넘어 용진면사무소가 위치해 있고, 북동쪽으로는 호성군 이주 묘소와 재실인 행지정사가 있다. 농은마을은 옛날에는 인접한 한사월과 같은 마을로 호성군 이주에게 내려진 사폐지의 표지석이 있는 곳이다.

15) 한사월길

한사월은 농은마을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호성군 이주의 고향으로 그의 호인 한촌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한촌(寒村)이 한사월로 변했던 것이다.

호성군은 조선왕조 7대 임금인 세조의 아들 덕원군의 증손으로,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주와 임실에서 의병을 소집하여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여 성을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선조가 의주로부터 한성으로 환도할 때에는 시종 선조를 호종하였다. 그는 33세의 짧은 나이로 운명하여 호성군에 봉해지고,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훈적에 기록되었으며, 한사월과 농은리 일원을 사폐지로 내렸다.

16) 상중마을길

상중리는 산남뜸과 행나무뜸이라고 하며, 모천골을 사이에 두고 새터와 이웃하고 있다. 이 마을은 봉바우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큰 살구나무가 있어서 행나무뜸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1957년 전주시로 편입되었는데, 전에는 초포면 송전리로 오산의 작은 마을 중 하나였다. 송전리는 크게 오산·하오리·중오리로 나뉘며, 오산은 동살메·오산·새터·상중리·감정골 등 다섯 개의 마을이 건지산의 크고 작은 산자락에 소양천을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17) 오산앞길(오산윗길)

오산은 동네 산 밑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큰 바위가 2개 있고 논 경기정리를 하면서 고인돌이 많이 유실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건재하고 있는 바위의 모양이 자라처럼 생겼다 하여, 자라오(鰲)자와 산의 우리말인 ‘뫼’를 합쳐 오매라고도 불렀다. 즉 마을에 자라를 닮은 바위가 있어 한자로 오산(鰲山)이라고 한 것이다.

18) 호성숨멀길

숨멀은 중오리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용주리(龍舟里), 섬말, 도촌(島村)이라고도 불리는데, 옛날에는 배가 이곳까지 닿았다고 전해온다. 경지정리를 하기 전에는 마을의 북쪽에 시암보라는 보가 있었는데, 땅에서 솟아나는 수량이 풍부해 농업용수로 유용하게 쓰여 졌었다.

19) 호성신중길

신중리는 소양천 좌안 제방 왼쪽에 있다. 진입로 초입의 새터와 신중리가 같은 동네로, 중오리 보다 늦게 마을이 형성되었다. 기미년에 일제가 소양천의 제방을 막고 나서 마을이 생겼다. 즉 새로운 중오리라 하여 신중리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고도 한다.

20) 중오길

중오리는 1957년 전주시로 편입되기 전 초포면 송전리로 새터, 신중리, 중오리, 숨멀로 나뉘어져 있었다. 동네 이름을 볼 때 상․중․하에서 중오리와 하오리는 있는데, 상오리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즉 중오리는 오매의 중간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21) 하오리길

하오리는 고산천과 소양천이 합수되는 곳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하오리 입구에 들어서면 마을 진입로를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마을이 송전리와 신중리이다.

하오리는 오매(오산)와 관련이 있으며 즉 오매의 아래쪽에 있다하여 하오라고 명명한 것이다.

22) 하오신봉길

신봉(新鳳)마을은 하오리 진입로에서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신봉리는 두 뜸으로 이루어졌는데, 용흥리의 용과 짝이 되는 봉을 연결시켜 새로운 봉이라 하여 신봉리로 한 것 같다.

23) 하오용흥길

용흥리는 하오리 진입로에서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초당 3칸이 마을 중심에 있었으나 지금은 옛 정취를 찾을 길 없다. 용흥(龍興)이란 말은 용처럼 기운을 발산하여 마을이 흥하라는 뜻에서 명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4) 하오서주길

서주(西舟)마을은 용흥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하오리와 신중리 사이에 있다. 특히 서주리 앞에서 신봉리 까지는 구레 중에서 상구레 지역으로 그 주변의 뜰을 상구레뜰이라고 불렀다.

25) 하오신흥길

예부터 사용하던 마을 이름을 명칭으로 부여

26) 하오송전길

하오리 송전은 고산천과 소양천이 합수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소양천 제방에서 입구로 들어서면 마을진입로를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마을이 송전이다. 솔밭뜸이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마을 뒤로 솔밭이 있었다고 한다. 하오리는 1957년 전주시로 편입되기 전 초포면 송전리로 작은 마을인 송전·신봉·용흥·서주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건지산 지역

건지산 지역 이미지

1) 건지로(건지산로, 길)
- 기점 : 금암동 1595-12
- 종점 : 금암동 98-39

『동국여지승람』편의 전라도 전주부(全州府) 산천편에, “건지산(乾止山)은 전주부의 북쪽 6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라 되어 있다. 이규보(李圭報)의 기(記)에는 “전주에 건지산이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여 주(州)의 웅진(雄鎭)이다.” 라 하였다. 이곳에는 광무 3년(1899)에 단(壇)을 쌓아 만든 조경단(肇慶壇)이 있는데, 조선조 이씨왕조 시조인 한(翰)의 묘역(墓域)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조경(肇慶)’이란 ‘경사(慶事)가 시작된다.’ 라는 뜻으로, 전주의 진산인 건지산 왕자봉(王字峯) 끝자락에 있다. 고종이 친히 비문을 지어 세운 대한조경단비(大韓肇慶壇碑)가 있는데, 전면은 고종(高宗)에 쓰고, 후면 음기(陰記)는 당시의 명필 윤용구(尹用求 : 1853∼1939)가 비문을 써서 세웠다.

건지를 사용하는 도로명은 전북대병원 남쪽지역에 해당되며, 동남우정과 한양아파트 그리고 전주 안디옥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2) 조경단로
- 기점 : 금암동 522-109
- 종점 : 송천동1가 778-28
  • 조경단로는 금암광장사거리에서 금암중앙하이츠(구 금암아파트) 방향으로 가다 백제대로를 만나도 직진하여 전북대 동쪽지역인 지하차도를 통과하여 직진하면 혼불문학공원과 전라북도어린이회관을 지나 전주 21세기병원에 도착하는 길이다.
    조경단로 명칭은 지하차도를 지나면 전주동물원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오는데, 바로 이 길을 따라 약 1500미터 정도가면 야산에 조경단이 위치하고 있다. 조경단은 건지산 줄기에 울창한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곳은 태조의 21대조인 이한공의 묘역이 있는 자리로 역대 왕들이 묘역을 각별히 수호하고 있다. 특히 고종은 1899년(광무 3) 5월에 이곳에 단을 쌓아 당상관을 배치하고 비석을 세워 전주이씨 시조의 묘로 정하고,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 전서로 직접 글씨를 써서 내려 보냈다. 또한 해마다 한 차례 제사를 지내고, 단을 중심으로 450정보의 단역을 마련하였다. 이로서 전주는 경기전과 조경묘 그리고 조경단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임증하는 중요한 증표로 관리하게 되었다.
  • 금암광장사거리와 금암중앙하이츠 주변
    금암광장사거리는 전에는 분수대가 있어서 분수대로 알려진 지역이다. 서쪽으로는 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원래 이 지역은 인후동 도당산에서 출발한 산줄기가 교통정보센터를 거쳐 지맥이 멈춘지역이다. 옛날에는 검암산을 중심으로 앞검암 뒷검암마이을 있었으나 옛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지금은 단지 앞검암경로당과 뒤쪽으로는 금암초등학교가 크게 자리하고 있다.
    금암중앙하이츠아파트 부근에는 주민들을 위한 작은 가계들이 늘어서 있으며 뒤쪽으로는 전주시립 금암도서관이 있다.
  • 전북대 동문 주변
    전북대 동문지역은 전북사대부속고등학교와 전북대학교 병원과 치과병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위치해 있다. 주변에는 학생들을 위한 복사집 및 음식점이 많이 있으며 약간 안쪽으로는 금암노인복지회관이 있어 많은 어르신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전북대 동문에서 남쪽으로 약 230미터 내려가면 백제대로와 만나 사거리를 이루는데, 이 지역은 전문병원들과 상점들이 있는 지역이다.
  • 조경단부근
    건지산은 조선시대에 전주의 주산으로 동서학동 곤지산과 풍수상 짝을 이루었다. 건지산은 기린봉에서 인후동을 거쳐 도당산에 연결되어 한 자락은 전주역 쪽으로 뻗어 내려가고 또 한 자락은 방향을 바꾸어 농고 뒷산을 거쳐 매봉산으로 연결되어 깔바위를 이룬 다음 금암광장(분수대)에서 멈춘다. 나머지 한 자락은 북서로 뻗어 현 전북대 도서관, 전북대 농대를 지나 조경단 앞에서 멈춘다. 또 도당산과 매봉산 중간에서 또 한 자락은 도천봉으로 이어지고, 이곳에서는 조경단으로 이어지는 자락과 동물원 뒤편으로 돌아 대지동 뒷산 중구봉(혹은 토끼봉)으로 이어지는 자락으로 갈라진다.
    이렇게 형성된 건지산에는 전주의 조경단이 형성되어 전주가 조선왕조의 뿌리임을 증명하고 있다. 조경단 안에는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들어가는 입구는 솟을대문이 있고 묘역 중앙에는 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바로 옆에는 고종이 친필로 쓴 대한조경단비가 세워져 있다.
    조경단 부근에는 최명희의 묘소와 혼불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며, 바로 안쪽으로는 연화마을이 길게 자리하고 있다. 바로 옆 전라북도 어린이회관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각종 체험관 및 전시실을 갖추고 있으며 야외에서는 각종 전시를 실시하고 있다.
  • 호반촌비사벌아파트와 전주 21세기 병원 주변
    조경단로가 끝나는 호반촌 전주 21세기 병원과 비빕밥전문점인 고궁이 있는 지역은 가련산로가 하가지구에서 새로운 가련산을 뚫고 송천역까지 연결되는데 여기에 조경단 쪽에서 오는 조경단로와 맞닫는 부분이다. 이 지역은 인구 밀집지역은 아니지만 북쪽으로는 호반촌비사벌아파트가 근접해 있고, 덕진연못과 덕진 노인복지회관 및 덕진경찰서 덕진2치안센터가 있다.
2) 소리로
- 기점 : 덕진동1가 88-47
- 종점 : 호성동1가 757-24
  • 유래 및 의의
    소리문화의전당에서 전주동물원과 드림랜드를 거쳐 호성주공아파트에 이르는 도로이다. 소리로의 명칭은 전주의 문화적 특성인 소리, 서예, 음식 중에서 하나를 뽑아낸 것이다. 또 동시에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전주세계소리축제가 열리고 있어 한국과 외국의 다양하고 독특한 소리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다. 세계 음악의 새로운 교류의 장을 창출하고 매년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전 세계의 음악 관계자와 애호가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전주의 소리가 세계의 소리로 하나가 되는 만남의 장이 되고 있다.
  • 한국소리문화의전당과 전주동물원 주변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는 전주세계소리축제 및 세계서예비엔날레 등 국내·외 문화예술 및 공연이 열리는 곳으로 2,000여석 규모의 대극장과 국제회의장, 전시장이 들어서 있으며 7,000석 규모의 야외 공연장과 놀이마당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는 전주의 전통소리의 맥을 잇는 문화 예술의 전당이 있어서, 각종 국제적인 회의나 이벤트행사 공간 및 체험공간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앞에는 체육시설이 있어 베드민턴 및 축구 그리고 족구 등을 즐길 수 있과 덕진체련공원과 약수터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전주동물원은 1978년 6월 10일 문을 열어 전라북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물원 주변에는 드림랜드와 놀이시설을 갖추고 있다. 각종 다양한 동물과 조류 등이 있으며, 파충류와 양서류 등이 서식하고 있다. 또 자연생태공원으로 사시사철 어린이와 학생들이 체험학습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호성주공아파트 주변
    호성주공아파트 주변지역은 동물원쪽으로는 야산과 묘소가 있으며, 인근에는 우신호성아파트와 전주북초교가 위치해 있고 바로 동부대로와 연결되어 있다. 동부대로 바로 옆으로는 전라선이 지나가고 있으며 바로 뒤쪽으로는 농지나 산이 형성되어 있다. 새롭게 호성동쪽도 크고 작은 아파트와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중소단위의 상권이 형성되고 있다.
3) 권삼득로
- 기점 : 중노송동 495-33
- 종점 : 덕진동2가 30-17
  • 유래 및 의의
    권삼득로는 전주고 앞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선미촌, 진북우체국, KBS, 전주금암초등학교, 전북대학교, 덕진연못, 도립국악원, 호반촌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에는 전주의 명창인 권삼득기적비가 도립국악원 앞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권삼득기적비는 소리할 때 쓰는 북모양을 조각하여 만들었으며, 내용은 서예와 소리를 했던 석전 황욱이 썼다.
    국창 권삼득은 양반 출신의 비가비(非可非) 소리꾼이다. 그는 1771년 (영조47년) 전북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 양반가문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은 권정이나 사람소리, 새소리, 짐승소리의 세 소리를 얻었다고 해서 삼득(三得)이라 불리었다.
    12세때 부터 하은담(河殷潭), 최선달(崔先達)등으로부터 소리공부를 시작, 19세기 전반(순조) 8명창의 한분이셨다. 그는 전주 근교 산과 계곡 등을 떠돌며 소리를 익혀 득음을 함으로써 명창중의 으뜸명창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흥보가가 장기이고 더늠(특출한 소리대목)으로 후세에 전하는 것은 제비후리러 가는 대목인데, 이로써'설렁제'창시자가 됐으며 양반광대라는 이름의 「비가비」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
    권삼득기적비가 전북도립국악원 앞에 세워진 이유는 전주가 판소리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전주는 판소리를 비롯하여 전주대사습놀이대회가 일제시대에 끊어졌으나 다시 1980년에 전주대사습놀이가 부활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노송동 주변
    전주고 정문에는 홈플러스가 위치하고 있으며 많은 차량이 번잡하게 움직이는 지역이다. 이곳은 물왕멀이 있는 지역으로 후백제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했던 지역으로 주변에는 후백제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전주고는 노송대가 있는 지역으로 일제시대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연출했으며, 바로 전주시청쪽으로는 노송천이 흐르고 있다. 즉 전주고교와 동초교, 물왕멀지역은 후백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바로 옆 서농송동지역은 뚝넘어라는 별칭이 통용되고 있는 지역으로 선미촌이 자리하고 있다.
  • 진북동과 금암동 주변
    진북동지역은 진북동우체국을 중심으로 주택단지가 형성되 있으며 바로 금암동과 접경지역인 사천길을 따라 가면 모래내시장이 위치하고 있다.
    금암동 KBS전주방송국은 전라북도 지역의 공영방송을 책임지고 있으며, 바로 앞쪽에는 구멍이 뻥 뚫린 바위가 있다. 방송국에서 조금 내려가면 금암초교와 전북은행 본점이 있다. 전북대 앞길은 뽕나무가 많은 지역으로 잠업을 많이 했으나 택지개발로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 없다.
  • 전북대와 덕진연못 그리고 전라북도도립국악원 주변
    전북대학교(全北大學校)는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호남권 최초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국립대학교이다. 1947년10월 15일 개교한 도립 이리농과대학교를 근간으로 군산대학관, 호남대학, 명륜대학을 흡수 통합하여 1951년 국립 전북대학교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2007년 개교 60주년 기념행사와 함께 익산대학과 통합이 이루어져 2008년 신입생을 모집하였다. 교내에는 박물관 및 학생회관 그리고 중앙도서관 등은 일반인들이 활용할 수 있으며, 각종 편의시설과 평생교육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덕진연못은 완산팔경의 하나로 사시사철 관광객이 끊이질 않으며, 특히 오월 단오날에는 창포에 머리를 감는 풍습이 남아있어 많은 부녀자들이 찾아온다. 양력으로 7월초에는 연꽃이 장관을 이루며 팔각정과 각종 전시관에는 연중 전시회가 열리며, 분수대에서는 주야간에 분수쑈가 이어진다. 취향정에서 연꽃 향기에 취하여 연진 연못의 물고기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면 가히 신선이 따로 없는 곳이다.
    전라북도립국악원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음악의 세계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국악 인구의 저변 확대와 전문 국악인의 후진 양성을 위해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전통음악에 현대음악을 접목시키는 퓨전음악의 새로운 영역을 창조함으로써 국악의 정체성을 살리면서도 현대인이 국악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정기공연 및 목요상설공연 등 연간 100회 이상 각종 공연을 실시하고 있다.
    이곳에는 권삼득기적비가 북모양으로 조각된 돌조각에 새겨져 있으며, 그는 전주 근교 산과 계곡 등을 떠돌며 소리를 익혀 득음을 함으로써 명창중의 으뜸 명창으로 널리 알려졌다. 판소리의 대중화로 민중 예술음악으로 발전시킨 인물로 특히 [흥보가]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양반출신으로 사회적 차별을 뒤로 한 채 소리를 선택한 명창 권삼득은 이고장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 호반촌주변
    1980년대에 대통령이 내려와도 묵고 갈 수 있도록 전주시 덕진공원 옆 호반촌 넓은 부지에 마련한 도지사 관사는 한 때 전북예술회관 분관으로 사용한적이 있었고, 이후 전북외국인학교로 활용하다 이제는 도립문학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호반촌은 부자가 많은 지역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호반촌 지역에는 고궁 비빕밥전문점이 자리하고 있다.
5) 덕진연못길

전주8경 중의 하나인 덕진연못은 초여름면 연꽃으로 수려한 장관을 만들어 낸다.

덕진연못길은 덕진연못 뚝방에서 가련산으로 연결되는 부분의 마을로, 전주덕진공원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된다. 이곳의 주요 건물은 덕진예술회관과 세원아파트가 위치하고 있다.

6) 창포길

덕진연못의 창포(菖蒲)를 상징하여 길 이름을 창포길로 반영하였다. 이곳 연못의 여수로(濾水路)인 덕진교 아래는 근동에 알려진 유명한 창포터로, 각종 짓걸(종기, 부스럼 등 피부병)에 효능이 있다하여, 단오절이면 이곳에서 부녀자들이 부끄러움을 묵살하고 웃통을 벗어부치고, 몸을 씻고 머리를 감는 진풍경이 벌어졌던 곳이다.

창포는 덕진연못의 물을 정화하는 동시에 각종 피부병에 특효약이었다고 한다.

7) 덕암길

덕암(德岩)마을 건지산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하며 연화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다른 이름은 심금동 또는 덕중리 불렀다. 마을 앞에는 덕진연못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전북대기숙사와 전주이씨 화수각이 자리 잡고 있다.

심금동이란 한것은 옛 전주이씨 화수각이 승금정(勝金亭)으로 부를 때 나온 명칭으로 전주이씨의 이(李)자가 나무목이기 때문에 금을 이겨야 한다는 의미에서 승금정이라 명명한 것이다. 즉 승금정이 변하여 심금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고 덕중리는 덕진연못(덕암)의 중심마을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는 듯 하다.

8) 연화길

연화(蓮花)마을은 덕진연못 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덕진연못에서 이름을 삼은 것이다. 이 마을의 다른 이름은 탱자동(탱기동)인데, 탱자나무가 많아서 지어진 이름은 아니라 하며, 마을 뒤에 동내사람들이 사용했던 공동시암(우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현재 마을 입구 사거리에는 세규(석유)배미, 똥통배미라는 논 이름과 돈너물고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세규배미는 뻘겋게 지름(기름)이 둥둥 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똥통배미는 옛날에 똥을 받아 찌크렸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하며, 돈너물고개는 송천동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곳에 돈나물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 정화사업으로 도로가 정비되고 농사도 친환경농법을 사용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즉 연화동은 건지산 너무 한적한 시골마을로 농촌문화가 그대로 남아있는 마을로, 연꼿이 피는 이상적인 한적한 동네를 지칭하는 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

9) 대지길

대지마을은 건지산 자락인 장구봉과 갈미봉에 둘려 쌓인 마을로, 대젯골에 자리 잡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지동은 용수마을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지마을은 전주동물원 북쪽에 있는 마을로 과수원과 밭농사를 주로 하며 생활하고 있다.

가련산 지역

가련산 지역 이미지

1) 가련산로
- 기점 : 덕진동2가 491
- 종점 : 송천동2가 454-9
  • 유래 및 의의
    가련산은 덕진연못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기맥이 덕진연못에서 연결되기 때문에 가련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덕진연못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는다. 단지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도성방위를 위하여 늪을 만들었다고 하기도 하고, 그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기도 한다. 덕진연못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조선 성종 때인 1481년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덕진연못은 전주부 북쪽 10리쯤에 있다. 그런데 전주부의 지세가 건(乾)이 공허하여 기맥(氣脈)이 흘러나간다. 이런 까닭에 도성 서쪽에 있는 가련산에서부터 동쪽에 있는 건지산을 이어 큰 뚝을 쌓아 완성하였다. 이를 덕진(德津)이라 불렀다. 연못의 둘레는 9703척이다.(德津池 在府北十里 府之地勢 乾維空缺 氣脈洩焉 故西自可連山 東屬乾止山 築大堤以止之 名德津 周九千七十三尺)”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전주부의 지세와 기맥이 흘러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건지산에서 가련산으로 큰 뚝을 연결하여 허를 보완했던 것이다. 그 가련이라는 말은 가이 곳 이어진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산의 명칭치고는 상당히 재미있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 가련산과 덕진연못 주변
    가련산에서 추천대가 있는 지역으로는 신도시가 개발되고 있으며, 대형아파트 및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현재 가련산은 하가지구 신개발지역에서 원광대 부속 한방병원 옆으로 새 길이 나면서 산중턱이 단절되어 아쉬움을 더한다.
    덕진연못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의 중종실록 1525년(중종20년) 8월 기록을 보면 전라관찰사 홍경담이 올린 장계에 의하면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은 녹주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건지산에서 흘러내려 이루어진 덕진연못의 제방 일대의 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고 전답으로 개간을 하였다. 중종반정이 성공되자 이것을 옛날의 상태로 복원을 하였는데, 임금이 반정의 공신인 유순정에게 건지산과 덕진연못 일대의 토지를 하사하였다. 유순정은 다시 토지를 개간하여 건지산과 덕진연못에는 나무가 거의 없게 되었다. 이에 전주부성의 백성들이 분통함을 참지 못하여 개간을 폐지하고 옛 모습으로 복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탄원서를 전라감사에게 제출하였고 전라감사는 이를 왕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럿듯 덕진연못과 가련산은 전주의 생태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관리 보호되어야 할 것이다.
    덕진연못에는 취향정과 왕버들나무가 어우러져 있으며 들어가는 입구의 연지문은 강암 송성용이 썼다. 연못 앞에는 덕진종합회관과 전라북도 도립국악원이 있으며 호반촌쪽으로는 주택들이 형성되어 있다.
  • 송천역과 송천동청과물도매시장 부근
    송천동은 전라고등학고 들어가는 굿마트 부근이 상권이 형성되었고, 송천역에서 서쪽으로 있는 청과물도매시장과 수산물도소매시장이 활기를 띄고 있다.
    주변에는 횟집이 형성되어 있고 뜨란채아파트 들어가는 입구에 먹자골목이 형성되었다.
2) 가리내로(길)
- 기점 : 금암동 461-10
- 종점 : 송천동2가 796-4

가리내로는 전주천과 삼천이 만나는 추천대에서 명칭을 차용한 것이다. 추천의 추자가 가리나무추자로, 가리나무는 호도보다 약간 길쭉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열매이다. 그래서 이 지역을 가리내, 가래여울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가리내로는 금암동 분수대에서 시작하여 전주시외버스터미널을 거처 천변을 따라 내리가는 길이다. 고속버스터미널과 백제교사거리를 통과하여 전주카서비스센타에서 직진하지 않고 좌회전하여, 명성아파트와 추천대교, 송천동을 거쳐 동부우회도로가 만나는 지점까지 가는 길이다.

가리내로는 시외버스터미널 부분만 빼고는 거의 천변을 따라 가기 때문에 가리내로 명명한 것이다.

하가지구는 새로운 아파트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3) 경동로
- 기점 : 덕진동2가 646-12
- 종점 : 덕진동2가 506

경동로는 전주천이 끝나는 추탄지역에 이경동을 기리기 위하여 추천대가 있어, 추천대의 주인공인 이경동의 이름을 차운한 것이다. 이경동은 조선 성종때 병조참판 대사헌이라는 높은 벼슬을 하던 추탄 이경동이 낚시를 하며 지내던 곳이며 그를 기리기 위하여 신설한 정자가 추천대이다. 추천대는 전주천과 삼천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황방산을 등지고 지은 정자로 현재는 후손인 정호가 사방 2칸의 누정을 세우고 벽하 조주승이 쓴 추천대편액이 전하고 있다.

4) 추탄로
- 기점 : 덕진동2가 530-1
- 종점 : 덕진동2가 625-6

추탄 이경동은 조선 성종때 병조참판 대사헌이라는 높은 벼슬을 하였고, 귀향하여 이곳에 낚시를 드리고 지내던 곳이다. 일반적으로 전주천과 삼천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추탄 이경동을 기리기 위한 추천대를 후손이 지었다. 그래서 이곳을 추탄(楸灘), 추천(楸川), 가르내, 사탄, 가래여울 등이라 했는데, 팔복동에서 덕진동으로 넘어 오는 길목에 놓인 다리도 예전에는 용산다리, 전주대교 등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이러한 연유로 추천대교라고 부른 것이다.

5) 하가로(길)
- 기점 : 덕진동2가 391
- 종점 : 덕진동2가 120-6

덕진공원 서편으로는 원대한방병원이 위치하고 바로 옆에는 가련산이 있다. 가련산 정상에는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충혼탑이 있다. 가련산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북쪽 산자락에는 학동과 아랫가르내, 서쪽 자락에는 웃 가르내, 남쪽 자락에는 사평이 있다.

아랫가르내의 다른 이름이 하가리(下可里)이며, 이 마을은 전주이씨 집성촌이다. 하가리 북쪽으로 놓인 다리가 추천교이며, 이 다리는 예전에 용산다리, 전주대교로 불리기도 하였다. 하가지구에서 기린대로 반대편에는 호반촌이 위치하고 있다.

하가길은 원광대 한방병원에서 천변쪽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주택들이 많은 편이다.

6) 호반로(길)
- 기점 : 송천동1가 308-1
- 종점 : 송천동1가 295-3

호반촌은 70년대 택지조성사업으로 만들어진 지역으로 인근에 덕진연못이 위치하고 있어서 일명 덕진호반이라고도 하였다. 호반촌은 남동쪽으로는 덕진이 있고, 북쪽으로는 전주천이 흐르고 있다. 덕진동물원 들어가는 입구에 고궁가든과 족보설렁탕집이 위치하고 있으며, 옛 도지사 관사터는 전북외국인학교로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현재 전라북도문학관을 개설하기위하여 추진 중이다.

덕진연못에서 흐르는 물은 덕진2치안센터를 앞으로 흘러 호반촌과 송천동 사이인 개울로 흐른다. 호반촌은 예전에 처음 택지개발 당시는 부유층들이 살았다고 전한다.

7) 사평로(길)
- 기점 : 덕진동1가 1547-112
- 종점 : 덕진동1가 1275-1

사평은 논에 모래가 많아서 사평이라고 하였는데, 주로 가련산 밑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사평로는 전주지방법원․지방검찰청이 있는 근방의 SK주유소에서 덕진광장4거리까지에 이르는 길이다. 이곳에는 현대자동차서비스센터와 KT북전주지사 그리고 덕진1치안센터가 위치하고 있다.

8) 들사평로(들사평서로, 길)
- 기점 : 덕진동1가 1436-8
- 종점 : 덕진동1가 1267-22

공설운동장 서쪽으로는 사평이 있어 이를 나누면 법원쪽으로는 사평뜰이 있고, 약간 남쪽으로는 들사평이 있었다. 공설운동장이 인봉리에서 덕진으로 옮겨온 후 60년대 중반만 해도 동쪽으로는 용산뜰과 장제뜰이 모두 논밭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들사평은 전주종합경기장의 북서쪽에 있는 길이름으로, 대표적인 학교는 덕진초교와 전라중이 위치하고 있다.

들사평로는 전주카서비스센타 앞길에서 동쪽으로 전라중학교와 덕진초교를 따라 기린대로에 이르는 길이다. 바로 우측에는 전주종합경기장이 위치해 있다.

들사평서로는 야구장이 옆에서 시작하여 전주지방법원 주차장쪽으로 난 길이름이다. 이곳은 전라중학교를 지나가며 법원 앞쪽에는 변호사와 법무사무실이 많이 있다.

9) 덕진광장로
- 기점 : 덕진동1가 1276-6
- 종점 : 덕진동1가 664-1

덕진광장사거리에서 전북대 박물관 쪽으로 향하여 가면 권삼득로와 만나는 지점까지에 이르는 길이다. 이 지역은 현재 덕진광장(바람의 언덕)으로 조성되어 각종 음식점과 문화공간이 만들어져 있으며, 특히 군산과 익산방면으로 가는 많은 사람들이 시외버스 정류장을 사용하고 있다.

덕진광장은 전라선이 현재의 전주역으로 옮기기 전에 사용하던 덕진역으로, 옛날에는 이곳 주민과 주로 전북대학생들이 통학을 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한 역전이였다.

10) 명륜길

고려말기부터 조선시대까지 유학을 가르치던 강당을 명륜당(明倫堂)이라고 하였고, 전북대학교의 전신인 명륜대학은 이후 이름을 개명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북대의 전신인 명륜대학의 명륜을 사용하여 전북대학교 앞에 있는 길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이곳은 뽕나무가 많아 누에농사를 많이 했던 지역이지만 지금은 전북대학교 학생들의 편의시설과 문구를 파는 곳으로 변하였다.

명륜길에는 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와 동백웨딩타운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전주 구 덕진역이 있었던 자리에 덕진광장이 조성 되어 있으며 익산과 군산지역으로 가는 시외버스 간이정류장이 있고 바로 옆에는 덕진우체국이 있다.

11) 떡전로(길)
- 기점 : 금암동 791-16

떡전로의 떡전은 옛부터 사용하는 떡전거리에 나온 말이다. 떡전거리는 예전에 서울 갈 때 잠시 쉬던 길이 었고 맛있는 떡을 파는 떡장수들이 많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떡전거리는 현재 광주고속버스 앞에 위치한 마을로 지금 떡장수는 많지 않지만, 현재는 다양한 음식을 파는 곳이 많다.

12) 태진로
- 기점 : 태평동94-30
- 종점 : 금암동 457-1
  • 유래 및 의의
    태진로는 태평동94-30에서 출발하여 진북동을 통과하여 분수대에 이어지는 길이다. 그래서 태평동의 태자와 진북동의 진자를 따서 태진로라 부르게 되었다. 원래 태평동을 사람의 삶이 태평성세가 되기를 원함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진북동은 전주의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태평동은 옛 전주역(협괘열차)과 전매청이 있어 주로 공구상들이 많이 밀집되 있는 지역이다. 전주초등학교는 전주향교 양사재에서 시작하여 1925년 이 자리로 옮겨져와 많은 졸업생을 배출했고, 학교안에는 독립기념비와 학교를 세운 기념비가 있다.
    진북동은 숲정이가 있는 숲정이성지와 덕진구청과 그리고 전주시교육청을 통과한다.
  • 태평동 주변
    태평동 94-30지점은 주예수교회가 있는 지점에서 서쪽으로는 도토리골을 가는 길이고 동쪽으로는 전주시청과 연결되 있으며, 북쪽으로 분수대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주변에는 전주초등학교가 있고 약간 북동쪽으로는 태평동농협과 KT&G SK뷰아파트가 조성되었다. KT&G SK뷰아파트자리는 원래 전매공사전주연초제조창으로 예전에는 많은 전주사람들의 소득원이기도 하였고, 때론 초등학생들 견학코스이기도 하였다. 전주연초제조창은 흔히 전매청이라 부르는데 일제시대에는 경편철도가 이곳에 있었고, 가장 먼저 전주역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철도로 인하여 공구상 상점들이 형성되었고 지금까지도 특수공구상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 진북동 주변
    동양아파트는 옛날에 동양제사가 있었던 자리로 유명한 곳이며, 구MBC자리에 노블레스웨딩홀이 있다. 진북동에는 교육기관이 많이 있는데 전주시교육청을 비롯하여 전북학생종합회관과 전라북도교육문화회관 및 전일초등학교가 있다. 그리고 앞쪽으로는 행정기관인 덕진구청과 북전주세무서가 있으며 전북도민일보가 자리하고 있다. 진북동이 끝나는 건산천에는 복개공사를 하여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복개된 천변을 지나면 분수대가 나오는데 이곳에는 자동차와 관련된 상점들이 약간 있다.
13) 용산길

용산은 용산뜰, 용산평으로 불리던 지역에 붙여진 길이름으로, 덕진공설운동장에서 떡전거리를 지나 현재 시외버스터미날 부근에 해당한 지역이다. 용산뜰 지역은 1970년대에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 1973년에 금암동에 시외버스터미널이 생기게 되었고, 1980년에는 진덕교 앞에 금암 고속버스터미널이 세워지면서 전주의 교통중심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송천 지역

송천 지역 이미지

1) 송천로(길)
- 기점 : 송천동 1가 291-2
- 종점 : 송천동 1가 837-1

조촌면의 오송리와 시천리가 전주시로 편입된 후 사용된 법정동명인 송천동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조선조 영조(英祖)가 시조묘(始祖廟)를 조경단(肇慶壇)에 봉안할 때, 영의정인 김치인(金致仁)이 중대한 일을 도신(道臣)에게 전임시켜서는 아니 된다 하고, 직접 전주에 봉심차(奉審次) 내려와 건지산(乾止山) 일대를 둘러보고, 송천동 골짜기를 가리키며, 『乾末微初 可活萬人之地(건말미초 가활만인지지)』라 하면서 감탄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만여 명의 사람들이 활발하게 살 수 있는 자리라고 풍수지리설을 들어 예견을 한 것으로, 후에 35향토사단이 들어서게 되었음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하겠다. 당시 송천동(松川洞) 일대는 적송(赤松)이 울창했고, 산 계곡 끝이 되는 서쪽으로 전주천 물이 넘치게 흘렀을 뿐만 아니라,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맑아 솔밭과 내를 연유하여 송천동이라 했다고 한다.

2) 솔내로(길)
- 기점 : 송천동 1가 265-74
- 종점 : 송천동 2가 293-5

솔내는 송천(松川)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솔내는 건지산 자락의 서남쪽과 가르내 사이에 위치하며, 1957년 조촌면의 오송리와 시천리가 전주시로 편입되었다. 냇가나 저수지·소(沼)·여울이 많아 전주시 북부권의 물길과 바람길의 통로였다. 시천(동아아파트와 롯데아파트 도로의 동쪽지역), 용소리(용소초등학교부근), 붓내(솔내성당 서쪽지역), 고내(하수처리장) 등이 이에 연관되는 지명이다.

3) 오송로(길)
- 기점 : 송천동 1가 산60-5
- 종점 : 송천동 1가 11-2

오송은 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다 하여 오송리로 불렸다 한다. 오송의 가운데 글자인 송과 시천의 가운데 글자인 천을 합성하여 송천이라고 하였다. 현재 오송지구 송천진흥더블파크 남쪽지역으로 건지산자락의 북동능선과 북사면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바로 옆에는 오성제라는 저수지가 있다.

오송로는 송천동 솔빛중학교에서 우측으로 산길을 따라 송천현대2차아파트와 송천진흥더블파크 남쪽으로 난 도로이다. 아직 개발되는 중이어서 송천동 오송리 인근 도로로 예부터 사용하던 지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4) 와룡로(길)
- 기점 : 송천동 1가 608-1
- 종점 : 송천동 2가 664-50

와룡로는 송천뜰 한양아파트 사잇길에서 북쪽으로 쌍용아파트1,2단지, 동아아파트와 롯데1차아파트 서쪽으로 난 도로이다.

이곳 지명은 송천뜰 북쪽에 있는 와룡리의 지명을 부여한 도로명이다. 와룡리는 뒷산 등성이가 용이 누워있는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 뒷산이 명당자리라 하여 사람들이 묘를 많이 썼다고 한다. 송천동의 용흥, 와룡, 용소와 전미동의 회룡, 팔복동의 반룡을 합해져 오룡이라 하는데, 와룡리에 누워있던 용이 용흥리에서 일어나, 회룡과 반룡에서 반대로 돌아 용소리에 깃든다는 이야기가 지명과 관련하여 전해지고 있다.

5) 시천로
- 기점 : 송천동 2가 945-1
- 종점 : 송천동 1가 543-93

오송리와 함께 송천이란 동명을 만든 시천(詩川: 붓내, 글내, 필천, 봇내)리는 현재의 송천2동 동아아파트와 롯데아파트 도로의 동쪽지역으로 지금은 상가로 변해있는 지역이다. 송천동에는 오송제와 더불어 시천제라는 방죽이 있었으나, 이곳의 시천제는 1998년 이전에 매립되어 송천도서관과 솔내청소년수련관이 세워졌다.

6) 신풍로(용소로 도로명 변경)
- 기점 : 송천동 1가 684-1
- 종점 : 송천동 2가 613

송천동 전진자동차공업사에서 전주농수산물시장까지 가는 길이다. 북쪽으로 대명궁전아파트와 제일아파트를 거쳐 동아아파트와 롯데1차아파트에 이르는 도로명이다. 이곳은 사람들이 바람 따라 떠돌다가 정착한 마을이라고 하여 신풍리라 하였고, 전주 8미의 하나인 애호박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7) 두간로(길)
- 기점 : 송천동 1가 832-1
- 종점 : 송천동 1가 812-1

발단리 남쪽에 있었던 두간다리를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이 다리는 현재 농수산물시장 서쪽에 있던 독다리로, 가운데에 큰 돌을 괴어놓고, 그 위에 큰 돌 두 개를 걸쳐 놓아 두간다리라 했다 한다. 이 다리를 통해 고산·운주·대전을 거쳐 서울로 갔다 하며, 웬만한 장사들은 다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다리이다. 남쪽지방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너 한양까지 갔던 다리라 한다.

두간다리 앞에는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를 자빠트리면 발단리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곳 주민들이 신경을 많이 썼다고 전한다.

두간길은 농수산물 남쪽에 있는 지역을 블럭을 설정하였다.

8) 붓내길

붓내는 솔내성당 서쪽지역으로 붓내의 어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붓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흘러가는 내란 뜻으로 한자로는 ‘필천(筆川)’이라 하며, 또 하나는 마을의 서쪽 가르내에 보가 있어 봇내라 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여 붓내가 되었다 한다. 또 다른 하나는 가르내에 있는 보에서 물레방아를 돌려 방아도 찧었는데, 이때 나오는 분(가루)으로 하여 분내라 불리다가 붓내로 변했다고도 한다.

9) 천마산로
- 기점 : 송천동 2가 529-7
- 종점 : 호성동 2가 631-23

솔내고등학교 삼거리에서 동쪽방향으로 현대주택을 거쳐 현재는 길이 없지만 진흥터블파크2차 3단지인 현 동부우회도로의 전주시 차량등록사업소 교차로에 이르는 길이다. 전주시 차량등록사업소 우측에 있는 천마산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의 형상이라고 하여 천마산으로 불리고 있다. (일부 도로 개설 중)

10) 사근길

사근(沙根)은 용소 동쪽에 있는 마을로 송천동 오송리 맞은편에 있다. 사근리는 사금리 또는 사금평이라고 불리었으며, 현재 현대3차아파트에서 송천동 예비군훈련장에 이르는 지역이다. 송천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와 송천 2지구 주공아파트 공사현장에서의 문화재가 발굴된데 이어, 35향토사단과 송천동 오송지구에 인접한 세진아파트 건설현장에서 구석기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발굴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지역이다.

전미 지역

전미 지역 이미지

1) 전미로
- 기점 : 송천동 2가 655-5
- 종점 : 전미동 2가 74-8

전미동은 송천동에서 비행장을 굽이돌아 하리교를 거쳐 삼례로 가는 옛길의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쪽은 전미동 1가, 동쪽은 전미동 2가이다. 전미동은 대미봉에서 송천동의 고내 앞까지 뻗어 내린 산줄기의 북쪽 자락을 고산천이, 서쪽 자락은 가르내가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며, 대미봉에서 내려온 산줄기를 전미동에서는 송산 또는 고살뫼라 부르는데, 송천동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도로는 동부우회도로 송천동 발단리 4거리에서 전미동을 거쳐 하리교에 이르는 도로다. 법정동 통합이후 사용된 법정동명인 전미를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완주군 초포면의 전당리와 미산리가 1957년 전주시로 편입되면서 전당과 미산의 첫 자를 따서 전미동이라 하였다.

2) 전미중앙로
- 기점 : 전미동 2가 1229-1
- 종점 : 전미동 1가 58-1

전미동 2가 전당리 현 백석로에서 전미동 월평 미산초등학교 앞을 지나 전주천의 미산교에 이르는 도로다. 법정동 통합이후 사용된 법정동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1957년에 완주군 초포면 전당리와 미산리가 전주시로 편입되어 전당리가 전미동 1가, 미산리가 전미동 2가가 되었는데, 두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다.

3) 고내로
- 기점 : 송천동 2가 1024-8
- 종점 : 전미동 2가 산30-3

고내마을 하수종말처리장에서 새로 신설되는 송천비행장 넘어 전미로에 이어지는 도로명이다. 고내란 고랑, 골안의 옛말로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물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오늘날에는 전주천의 간선과 지선이 뚜렷하여 농업용수로 쓰기에 불편이 없는 상태이나, 조선시대에는 건지산 일대 계곡물이 너무 차가워 농업용수로는 적합하지 못하고, 둠벙 처럼 고인 고내의 물이 유일하여 마을 이름이 연유되었다 한다.

4) 고내천변로
- 기점 : 송천동2가 976-4
- 종점 : 전미동1가 244-1
  • 유래 및 의의
    고내천변로는 고내마을 천변에서 시작하여 신촌마을 앞 미산교를 지나 만경강을 만나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다 하리교를 지나 회포대교에 이르는 천변길이다. 고내마을은 송천동에서 미산초등학교를 가다 비행장이 나오는 길이 꺾어지는데 이곳에서 직진하면 된다. 고내란 고랑, 골안의 옛말로 둠벙처럼 고인 물에서 유래되었으며 넓은 뜰을 가지고 있다. 고내마을 남쪽에 있는 뜰이 부아재뜰이 있으며, 마을 들어오는 입구에는 방죽받이가 있는데, 이 논들은 백석제에서 오는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하수처리장(시민친화환경공원) 앞에 있는 논은 뒤끌이라 불렀다.
  • 고내마을과 회룡마을 주변
    고내천변로가 시작하는 지점은 동부대로가 지나가는 지역으로 바로 옆에는 전주철교가 지나가고 있다. 고내천변로 지역에는 비록 주민이 많이 살지 않아 교통량이 많지는 않지만 전주천과 만경강을 끼고 자연생태계를 관찰하기에는 아주 좋은 길이다. 고내마을은 현재는 마을이지만 예전에는 하천이었다는 뜻이 숨어 있다. 즉 옛날에는 내(하천)였는데 일제시대 때 제방을 막고 사람들이 정착을 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회룡마을은 미산초등학교에서 월평을 거쳐 형성된 마을로 전주천쪽으로 직진하면 미산교가 있어 팔복동을 갈 때 사용하는 다리이다. 회룡마을 옆에는 새로 생긴 신촌마을이 있으며 파크골프클럽이 위치하고 있다.
  • 미산마을과 진조리마을 주변
    미산(美山, 微山)은 전미동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삼례 하리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구길이다. 옛날에는 조사리도 전주지역이였는데 일제시대 직강하공사를 하면서 물길이 바뀌는 바람에 지금은 완주에 속한다. 송천동에서 전미동으로 들어오면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미산초등학교이다. 여기서 직진을 하면 주정리, 숨멀(화리), 신미산이 길가에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으로 꺽어 들어가면 진조리마을이 있다.
    주정리는 지형이 배의 형국으로 배가 머물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주정리 주변에 한 50여평 되는 땅이 배의 형국인데, 경지정리 되기 전에는 그 땅에 농사를 짓지 않고 묵혀 두었다고 한다. 숨멀을 화리하고도 하는데, 이것은 일제시대 때 ‘벼가 많다’해서 부쳐진 이름이며, 우리말로 숨멀은 섬마을이 축약된 단어로 즉 지금도 샘을 파서 물을 먹어보면 짜다하니 이곳이 아주 옛날에 섬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5) 초포로
- 기점 : 전미동 1가 32-10
- 종점 : 호성동 2가 40-8

초포(草浦)는 조선시대 초곡면이 위치한 자리도 조선시대 물길이 만경강을 거쳐 소양천 초포까지 연결되어 작은 배들이 왕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초포로는 전미동 1가 전당리 현 백석로에서 호성동 2가 고당리를 연결하는 도로로, 예전의 행정구역 이름인 초포를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두 지역은 1957년에 완주군 초포면에서 전주시로 편입되면서 전미동 1가와 호성동 2가가 되었다.

6) 발단길

발단리는 송천동 비암골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버들다리로도 불리는데, 이는 버드나무로 된 다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발단리의 남쪽에는 옛날 한양길로 가면서 건너다니던 독(돌)으로 놓은 두간다리가 있었다.

7) 용흥길

송천동 부아재뜰의 동쪽 미산 자락에 있는 마을로 발단리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전에는 발단리와 용흥리를 합해서 유교리로 부르기도 했는데, 용이 일어나는 형국이라 하여 용흥이라 불렸다 한다.

8) 백석길

백석마을의 동쪽에 있는 백석재(白石치)에 흰색 차돌이 많아서 붙어진 이름으로, 지금도 일부가 남아 있다. 백석재는 전당리에서 송천동의 오송리방죽을 지나 전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마을에는 백석제(白石堤)라는 저수지가 있는데, 인근 송천동 지역에서 물을 저장하였다가 인근 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9) 전당길(전당안길)

전당(全堂)마을은 본래 전주군 회포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진조리, 백석리, 신봉리, 은평리, 연봉리, 일부를 병합하여 전당리라 해서 초포면에 편입되었다. 전당리는 원래 조리 형국이어서 마을의 기운이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그 나무 심어진 곳이 숲거리다. 약 300여년 전에 성을 알 수 없는 천미옹(일명 뙤집영감)이 풍수지리상 뒷동산줄기가 작아 마을이 조리터 형국이라 재앙이 있음을 미리 알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마을의 서쪽에 나무를 심고 자식처럼 정성을 드려 가꾸었다고 한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나무들이 많이 고사하고, 지금도 몇 그루가 건재하고 있다. 전당리 남쪽에는 백석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10) 숲거리길

전당마을은 조리 형국이여서 마을의 기운이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가 심어진 거리를 숲거리 또는 수구막이라고 하였다 한다. 즉 보맥유림(補脈有林)으로 조성한 나무로 인하여 숲거리라 한 것이다.

11) 강구레길

강구레는 숨멀 동북쪽 개울에 걸쳐 있는 다리로 전당리 숲거리와 진조리 사이에 있다. 이 곳은 강구레다리(갯드랑다리)라는 독다리가 있어 옛날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다리 중의 하나였다.

12) 은평길

은평(隱坪)은 전당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앞동네의 모정 밑을 흐르는 회천보뜰이 있고, 앞동네와 뒷동네로 사이로 흐르는 작은보똘(도랑)이 있으며, 뒷동네 뒤로 흐르는 새보똘이 있다. 뒷동네 뒤쪽의 경지정리를 하지 않은 들을 사슥끌, 사석끌, 뒤뜰이라고 부르는데, 그곳의 토질이 모래가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은평마을 서쪽에 뽕나무가 있었던 약간 언덕진 곳이 뙤동배기이다. 뙤동배기의 바로 옆이 진조리이다.

13) 진조리길

진조리(眞助里)는 은평의 서쪽과 전당리의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전당리 숲거리에서 강구레똘을 지나 마을로 진입하는데, 텃논·수랑뜰·바오뜰 등의 논이 있었다 한다. 은평리과 진조리 사이의 들 한 가운데 있는 마을이 연봉내이다.

14) 연봉길

연봉리(蓮峰里: 연봉내)는 은평과 진조리 사이의 들 한 가운데에 있는 마을로, 백석 서쪽에 있으며 구레에서 가장 가까이 있다. 연봉리 남쪽에는 2정보 되는 연방죽이 있어 연봉내 또는 연봉리가 부르게 되었다.

15) 숨멀길

숨멀을 주정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예부터 사용하던 이름이다. 숨멀은 옛날에 지형이 바다였던 곳으로, 지금도 샘을 파서 물을 먹어 보면 짜다고 한다. 즉 숨멀 지역은 옛날에 바다 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섬과 마을이 결합하여 섬마을로 부르다가 이것이 간략화되어 숨멀로 변한 것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벼가 중요하고 많이 생산되어 화리(禾里)로 불렀다 한다.

16) 주정리길

주정(舟停)리는 지형이 배의 형국, 또는 배가 머물러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 주변에 50여 평의 땅이 배의 형국으로 있었는데, 경지정리되기 전에는 농사도 짓지 않고 묵혀 두었다 한다.

주정리 지역은 만경강과 근접하고 있어 지형이 낮은 아주 지역으로 고대에는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머물렀던 지역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마을이다.

17) 신미산길

신미산(新美山)은 숨멀 북쪽에 있는 마을로 미산마을 이후에 생겼다 하여 신미산이라 한 것이다. 즉 해방 직후에 생긴 마을로 예전에 인근의 용수몰이라는 마을에 나환자들이 살았는데, 이를 염려한 화리사람들이 하리교 옆으로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라 한다.

18) 진기길

진기(陳機)리는 주정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무근뜰(들)로 불리는데, 묵은 들판에 마을이 생겼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무근뜰에서 제방 쪽으로는 항상 큰물이 차는 냇가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무근뜰 뒤로 합수번지에 이르는 뜰을 고산천 쪽으로는 뒷강안, 가르내 쪽으로는 앞강안이라 부르고 있다.

19) 전미월평길

미산초등학교 바로 옆에 월평·회룡·신촌이 있었는데 마을이 커지면서 마을 간의 경계가 없어졌다. 월평(月坪)은 원래 주정리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들판에 지형이 달 모양이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20) 회룡길

전주 오룡(五龍) 중에 하나로 마치 용이 돌아온다고 하여 회룡이라 했다 한다. 송천동의 용흥·와룡·용소와 전미동의 회룡, 팔복동의 반룡을 합해서 오룡이라 하는데, 와룡리에 누워있던 용이 용흥리에서 일어나, 회룡과 반룡에서 반대로 돌아 용소리에 깃든다고 전해지고 있다. 월평·회룡·신촌 중 제일 늦게 생긴 마을이다.

상가마을길

예부터 사용하던 마을 이름인 상가(윗가르내)를 길 이름으로 부여하였다. 윗가르내는 덕진동에 있는 가련산의 서쪽 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가르내란 지명은 추탄 이경동 선생의 효심에서 연유된 지명이다. 추탄의 부친인 달성공이 중병으로 몇 달째 누워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갑자기 위독하여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그때 추탄이 인근 비석날(현 팔복동 거드랑주)에 명의가 거주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밤 선걸음에 달려가 명약첩을 받아들고 급히 귀가할 때였는데, 때마침 뇌성벽력이 치며 폭우가 쏟아져 내려 삽시간에 전주천이 범람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추탄은 암담한 가운데도 촌각을 다투는 부친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앞뒤 가릴 것 없이 홍수로 넘쳐대는 전주천으로 뛰어 들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넘실대던 물살이 양쪽으로 쫙 갈라지면서 그가 걸어갈 길이 트이는 것이 아닌가. 그래 추탄은 전주천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었고, 그가 건너가자 갈라졌던 물길은 다시 합쳐졌다 하며, 한걸음에 달려가 약을 달여 부친에게 들게 하자, 이내 완쾌되었다 한다. 이는 그의 극진한 효성을 하늘도 감탄했다 하여, 이근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했을 뿐 만 아니라, 그의 효행이 귀감이 되어 마을주민들이 이곳에 나무다리를 놓았다 하며, 그때 냇물이 갈라진 곳을 중심으로 위쪽을 상가리(윗가르내), 아래쪽을 하가리(아랫가르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오늘날 추천교도 그의 호인 추탄(楸灘)에서 따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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