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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방산주변의 서부지역

제4부 황방산주변의 서부지역

서부신시가지 지역

서부신시가지 지역 이미지

1) 온고을로
- 기점 : 서신동 769-1
- 종점 : 반월동 858-3
  • 유래 및 의의
    온고을로는 서신동에서 반월동까지 이어진 길이다. 전주(全州)는 삼한시대에는 아름다운 나라 마한(馬韓)의 땅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百濟)의 땅이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바 대로 “백성이 즐거이 따른다”고 해서 ‘백제’라 이름지었던 백제의 통일이념은 “온”사상이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진흥왕 16년에 완산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경덕왕 15년 전주로 바뀐 전주의 “전(全)”과 완산의 “완(完)”의 뜻은 모두가 “온”이다.
    “온”은 완전하여 흠이 없으며 원만하여 모자람이 없고, 순수하여 티가 없고, 모든 것이 어울리며 따뜻하다는 뜻이다. 그 뒤 전주는 후백제를 세운 진훤(甄萱)의 도읍지가 되어, 후백제 왕궁이 지금 전주고등학교 근처인 무랑말에 있었다. 그 후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고려(高麗)를 건국한 왕건(王建)은 936년 이곳에 안남도호부를 두었으며 940년 다시 전주로 개칭하였다.
    윤곤尹坤이 그의 기에서 “나라의 발상지이며, 산천의 경치가 빼어나다.”라고 하였으며 서거정 또한 “(전주는) 남국의 인재가 몰려 있는 곳이다. 물건을 싣는 데 수레를 사용하며, 저자는 줄을 지어 상품을 교역 한다”라고 기록하였다.
    전주를 온고을 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주의 머리글자가 온전할 전全을 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주는 다름 고을과 달리 홍수나 지진 그리고 한발이 나지 않는 온전한 땅이다. 원래 완산이라는 지명도 완전할 완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름값을 톡톡히 하므로 사람들이 살만한 도시라고 하고 전주나 완산을 '완전한 고을' 의 의미로 온고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 온고을로 주변의 환경
    온고을로의 남쪽으로는 황방산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에 전주북부 경찰서와 전주교통방송이 있다. 북쪽으로는 전주공업단지가 펼쳐져 있으며 농협 하나로마트가 있다.
2) 세내로
- 기점 : 삼천2가 285-6
- 종점 : 효자3가 1473-1 (서곡LG)

세내로 (三川)는 삼천동 2가에서 비롯되어 효자동의 서곡 LG까지 이어진 길이다. 만경강의 지류인 삼천천이 <여지도서>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삼천. 관아의 서쪽 10리에 있다. 유점치鍮店峙 아래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고덕산과 모악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합류하기 때문에 ‘삼천’이라고 부른다. 북쪽으로 흘러서 안천의 하류와 합쳐진다.”

삼천은 완주군 구이면과 임실군의 운암, 신덕면의 경계 지점에 솟은 오봉산 자락에서 발원한다. 오봉산에서 구이 방향으로 북쪽을 향해 흐르는 삼천은 구이 저수지를 지나 추동 앞을 지나 그 너른 대지의 품에 안긴다. 삼천을 보통 세내라고 부르는데 세내는 독배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독배천 그리고 평화동 매봉 자락에서 흘러내린 맏내가 합수하여 이루어진 천 즉 세 개의 내가 합해서 이루어진 천이란 뜻이다. 현재는 삼천천에 보행로가 잘 조성되어 전주시민들의 산책로로 잘 활용되고 있다.

우측으로 서신동이 있고, 좌측으로 효자동이 자리 잡고 있다. 신시가지가 조성되어 있는 이 지역은 새로운 주거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3) 서곡로(길, 원서곡길)
- 기점 : 효자3가 1473-5
- 종점 : 효자3가1406 (전주세무서)
  • 서곡로 명칭부여의 유래 및 의의
    서곡로는 효자동 3가에서 전주세무서까지의 길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지명인 서곡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황방산은 크게 동북쪽과 동쪽, 동남쪽으로 세 개의 산줄기를 뻗어 내리고, 서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는 다시 세 개의 산줄기가 갈라지는데, 이 중 제일 북쪽에 있는 산줄기와 동북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 사이가 서곡이다. 마전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숫골, 섯골, 서곡, 서중리라고 부르는데, 황방산 동남쪽 자락에 있었던 여섯 개의 마을, 즉 서우리. 서중리. 용암리. 점터. 양지뜸. 윗동네를 통상 부르는 말이다. 여섯 마을 중에서 서우리만 세내의 산자락인 골밖에 있고, 나머지 마을들은 황방산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서곡은 동북쪽의 입구만을 제외하면 황방산의 산줄기가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다. 서곡이란 지명이 생기기 전에는 서곡을 골안육리라고 불렀는데 전라감사로 재직하고 있던 이서구李書九가 서곡 앞을 우연히 지나가다가 이 마을을 서곡이라고 부른 뒤에 생긴 이름이다. 서곡은 황방산을 등지고 세내를 바라보고 있는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춘 지역이다. 정감록에서 나오는 무병장수 서출동수西出東水의 비결을 갖춘 명당자리가 위치한 상서로운 골짜기란 뜻에서 서곡이라 하였다.
  • 서곡로 주변 환경
    서곡로의 서쪽으로는 황방산이 자리 잡고 있고, 동쪽으로는 산천이 흐른다. 서곡 촏으학교와 전주 지방 환경청이 있으며, 아파트 단지가 조성 되어 있다. 전주의 서쪽 약간 높은 지역에 있어서 전주를 에워싼 고덕산, 만덕산, 종남산, 서방산, 모악산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 바로 서곡이다.
4) 천잠로
- 기점 : 삼천2가 285-6
- 종점 : 효자3가 1404-3 (썬플라워 예식장)

천잠로는 삼천동 2가285-6"에서 비롯되어 효자3가 1404-3 썬플라워 예식장까지 이어지는 길로 전주의 서쪽에 자리 잡은 천잠산(153m) 이름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했다. 전주에서 김제로 가는 길목인 쑥고개를 넘어가면 다시금 안장봉, 선인봉, 새터봉으로 이어지다가 닷금산과 천잠산으로 솟는다. 현재 전주대학교가 천잠산의 품에 안겨 있으며 천잠산에서 북서진한 산자락은 큰매봉산과 작은 매봉산을 건너 황방산까지 이어진다.

천잠산은 전주대학교 뒤편에 있어서 전주대학교의 축제를 <천잠축제>라는 이름으로 열고 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평지돌출의 산이라 산세가 그런대로 볼만하다.

천잠로 좌측에 전주대학교와 비전대학이 있으며, 온고을 여고와 선화학교가 있다. 우측으로는 바우백이 공원이 있으며, 서부신시가지를 지나 선플라워 예식장으로 이어진다.

5) 황강서원로(길)
- 기점 : 효자3가 1588-7
- 종점 : 효자3가 1587

효자동 3가에 있는 황강서원로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황강서원 이름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황강서원(黃岡書院) 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으로 전북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전주 곤지산(坤止山) 아래에 있었으나,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그 뒤 새롭게 중건되었다. 그 뒤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다.

1898년(광무 2)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여 중건하한 황강서원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강당과 정면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인 외삼문, 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서원의 사당에는 이문정(李文挺)을 주벽(主壁:사당의 으뜸이 되는 위패)으로 하여 이백유(李伯由), 이경동(李瓊仝), 유인홍(柳仁洪), 강해우(姜海遇) 등을 배향하고 있다. 이문정은 고려 말 공민왕 때 정당문학(正堂文學)의 벼슬을 지냈다. 한때 왕에게 배불정책(排佛政策)을 간하기도 하였던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문학대(文學臺)라는 강당을 열고 후배를 양성하였고, 그의 뜻을 기려 창건한 황강서원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6) 문학로(길)
- 기점 : 효자3가 607-9
- 종점 : 효자3가 1599-9

문학로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기념물이자 정자인 문학대라는 정자 이름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전북기념물 제24호인 이 정자는 고려 말의 학자인 이문정李文挺이 고향에 내려와 노년을 보내며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공민왕 6년인 1357년에 세운 정자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순조 24년인 1824년에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중앙에 방을 두고 사방에 마루를 깐 정자이다. 그 후 이문정의 학문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황강서원黃岡書院에 그의 위패를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바로 근처에 기전여중고와 전북지방경찰청이 자리 잡고 있다.

7) 마전로(마전중앙로, 마전뜰로, 길)
- 기점 : 효자3가 1648-6
- 종점 : 효자3가 1627-1
  • 마전馬田로 명칭부여의 유래 및 의의
    서부신시가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마전로는 홍산로와 우전로 사이에 자리 잡은 길이다. 택지개발 전 마을 이름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했다. 척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달리는 말이 밭에 내리는 형국이라 하여 마전이라 하였고 마랏이라고도 부른다.
    전북지방경찰청과 대한방직이 있으며, 서부신시가지가 들어서고 있다.
  • 마전들로 명칭부여의 유래 및 의의
    마전들로는 효자동 3가에서 전북도청까지의 길로 택지개발 전 들 이름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했다. 달리는 말이 밭에 내리는 형국이라 하여 마전이라 하였는데 마전마을 앞의 들 이름이 마전들이다.
    마전과 세내 사이에는 제법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데, 그 들판을 흐르는 도랑을 안터도랑이라고 한다. 안터 도랑에서 마을 쪽으로 있는 들을 안터뜸, 바깥쪽으로 있는 들을 마전들이라고 하며 마전들에는 마랏방죽이 있다.
8) 척동길

효자동 3가에 있는 척동길은 택지개발 전 마을 이름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효자동 3가 중심에 있는 마을을 척동이라고 부르며, 척동을 잣골이라고 불린다. 마을 뒤의 황방산(도 산천)줄기가 잣대 형국이라 해서 척동尺洞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효자공원묘지와 그랜드 운전학원이 근처에 있다.

9) 배학길

효자동 3가의 배학 1길은 골짜기의 이름 및 택지개발 전 마을 이름을 인용하여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척동마을의 서남쪽에 있는 긴 골짜기를 배학골이라하고 방죽을 배학골방죽이라 하였다. 배학골에는 효자공원묘지가 있고, 배학골방죽밑으로는 가내뜰이다.

효자공원묘지와 만절못 그리고 그랜드 운전학원이 근처에 있다.

10) 석산길

효자동 3가의 석산 1길은 택지개발 전지가을 이름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용수물 동쪽, 바우배기와의 사이에 있는 작은 산을 돌이 많은 골짜기라고 해서 석산이라고 불렀다.

서부 시시가지가 들어서서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전북지방경찰청과 바우배기 공원이 근처에 있다.

11) 효자로
- 기점 : 효자동 3가 1071
- 종점 : 중화산동 2가 579-4

효자로는 이 지역의 행정구역 명칭 효자동을 도로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다. 효자동은 전주군 우림면의 송정리, 효자리, 홍산리 지역이 1935년 완주군 우전면에서 1957년 각각 효자동 1, 2, 3가가 되었다가 1973년 효자동으로 통합되었다.

효자동의 유래는 장개남(張凱男)이 인조 7년에 효자 정려를 받은 데서 비롯된다. 장개남의 효자문은 효자리에 있는데 그의 효행에 관해서는 새고기를 먹고자 하는 어머니를 위해 하늘에 축수했더니 기러기가 떨어졌다는 기러기배미 이야기, 한 겨울에 수박을 구하러 헤매다 수박골에서 수박을 구한 이야기, 송정에서 머슴살이를 해서 얻은 밥을 어머니께 드리기 위해 시내를 건너려 했는데 물이 불어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께 밥을 드리려는 일념으로 물에 뛰어들었더니 물이 갈라져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 내려온다. 효자로는 장개남의 효행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효자리는 전주박물관 근처이고 효자로는 서원로와 유연로 사이 즉 현 전라북도청 청사 부근이어서 다소 거리가 있다. 효자리 앞의 도로는 본래 쑥고개길로 불려온 까닭에 효자동의 유래가 된 장개남이 효행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효자로라는 명칭을 부여하게 된 것이다.

12) 농소길

효자동 3가에 있는 농소 1길은 택지개발 전 농소라는 마을 지명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농소마을은 황방산자락의 여뫼봉의 서쪽으로 안용수물과 뒷용수물이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바우배기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을 ‘용수물‘ ‘용소‘ 또는 ’농소‘라 하였다. 이 마을 동쪽에 용이 올라간 자국이 있다고 하며, 이러한 사연이 있어서 마을이름을 농소라 하였고 근처에 용수물 방죽이 있었다.

그랜드 운전학원 효자공원묘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안 용수물 앞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가 큰골이고, 큰 골 동쪽이 작은 골이다. 작은 골의 동북쪽에 조그만 골짜기는 수박골이다.

13) 바우배기길

효자동 3가에 있는 바우배기 길은 예전에 전해오던 이름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과거에 이 지역에 바우배기산이 있었는데, 현재는 택지개발로 인하여 바위백이공원 주변에 흔적만 남아 있다.

전주에서 이서 김제로 가는 716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근처에 호남제일고교와 온 고을 여고, 전일고등학교, 그리고 중소기업청이 있다.

14) 홍산로(홍산중앙로, 홍산북로, 홍산남로, 길)

삼천동 2가에 있는 쑥고개로에서 서신동까지 이어지는 길이 홍산로로 과거의 행정구역명을 도로명으로 부여하였다. 전주의 서쪽에 자리 잡은 황방산이 국립지리원의 지도에는 홍산洪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황방산을 "홍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동지지>에는 “서고산西高山으로 표시되어 있고, 그 산 아래에 서고사西高寺가 있으며, 관아에서 서쪽으로 15리에 있다‘고 실려 있다. 하여간 홍산 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홍산마을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이 홍산로 부근에 전북도청, 전북 지방 경찰청, KBS등 관공서들이 밀집해 있으며, 바로 근처에 삼천천이 흐르고 있다.

15) 봉곡로(길)
- 기점 : 효자3가 1215-2
- 종점 : 효자2가 122 (더샾2차)
  • 봉곡로의 명칭부여의 유래 및 의의
    효자동 3가에서 효자동 2가로 이어지는 봉곡로는 옛 마을 명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봉곡마을은 구룡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는 북쪽에 후곡이 있고 남쪽에 봉곡(봉강)이 있었다고 한다. 거의 한 마을이나 다름없는데, 봉곡 서쪽에는 봉곡 방죽이 있었다.
16) 후곡길

효자동 2가에서 3가를 잇는 후곡길은 과거의 지명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구룡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전에는 북쪽에 후곡이 있고 남쪽에 봉곡(봉강)이 있었다고 한다.

17) 호암로
- 기점 : 효자2가 683-11
- 종점 : 효자2가 533

효자동 2가에 있는 호암로는 천잠로와 홍산로 사이에 있는 도로로 과거 지명 및 바위 이름을 인용하여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호암이라고 부르는 범바위가 들녘의 중간쯤에 있어 호암리라 하였다.

휴먼시아 아파트 단지와 우림초등학교등이 밀집되어 있는 신도시이다.

18) 용호로
- 기점 : 효자2가 398
- 종점 : 효자3가 1670-1

용호로는 효자동 2가에서 효자동 3가까지 이어진 길이다. 홍산로와 천잠로로 이어지는 이 길은 옛 저수지인 용호지龍虎池 이름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구룡리와 호암리사이에 방죽이있어 구룡리에서는 구룡방죽, 호암리에서는 호암방죽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지역 주민들끼리 옷깃만 스쳐도 싸움을 할 정도로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용호상박이라 이도 저도 아닌 용호지라 불리었다고 한다.

용호로의 동쪽으로 삼천이 흐르고 바로 근처에 우전 초. 우전중 등 여러 학교가 있다.

19) 구룡길

효자동 2가에 있는 구룡 1길은 과거의 지명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했다. 이 마을의 지형이 거북과 용이 함께 있다고 해서 ,또는 아홉 마리의 용이 깃든 형국 이라서 구룡리라 하였다. 구룡리의 뒷산이 옹기봉인데, 옹기봉에서 가뭄이 심할 때 무제를 지내면 사흘 안에 비가 내렸다고 한다.

20) 범안길

효자동 2가에서 효자동 3가에 이르는 길이다. 과거 지명 및 바위 이름을 인용하여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구룡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 호암리虎岩里인데, 범암리 범바우라고도 부른다. 마을에서 여메마을 쪽으로 범바우가 있는데, 그 범바우와 마을이 마주보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효자 지역

효자 지역 이미지

1) 우전로(길)
- 기점 : 효자2가 1117-3
- 종점 : 효자3가 1627-6

우전로는 1957년에 완주군 우전면에 속해 있다가 전주시에 편입되어 평화동과 삼천동 효자동 등으로 딸리게 된 지명을 이르는 말이다. 또한 지금도 우전중학교가 있다.

마전들로, 홍산들로, 서원로등이 인근에 포진해 있다.

2) 소태정로(길)
- 기점 : 효자2가 1196-2
- 종점 : 효자2가 1199-3 (우림중학교)

효자동 2가에 위치한 소태정로는 옛 들 이름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반송정이 동북쪽에 있는 터가 소태정이인데 그 지형이 와우형이라고 한다. 위 터 옆의 큰 들을 소태정잇들이라 불렀고 또한 주변평지를 소태정이뜰이라고 하였다.

우림중학교가 바로 근처에 있다.

3) 원효자길

원효자길은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본래 전주군 우림면 지역으로 효자가 살았으므로 효자라고 지었다, 원래 효자리는 쑥고개에서 전주 쪽으로 오다가 보면 천잠산에서 남생이들까지 뻗어 내린 첫 산줄기와 끝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효자동과 삼천동의 경계에 자리 잡은 이 마을에 장개남 효자문張凱男 孝子門이 있다. 장개남의 어머니가 병들어 새 고기 먹기를 원하자 장개남이 하늘에 빌었더니 기러기 한 마리가 떨어져 구워서 드렸다. 기러기 떨어진 곳을 천수배미 또는 기러기 배미라고 부른다. 또 그가 어머니를 위하여 수박을 구하려 헤맸던 곳을 수박골이라고 부른다. 그가 송정리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자기 몫의 밥을 어머니에게 드리기 위하여 집에 갖고 가려고 시내에 이르렀다., 그런데 냇가에 다리가 없던 시절이라 냇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 물에 뛰어들자 그가 가는 길 앞으로 냇물이 갈라져 무사히 건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조선 중기 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인조 7년에 정려를 받아 세웠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전부 역사박물관 부근이 원효자리이다. 1번국도가 주변을 지나고 있다.

4) 한절길

한절길은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구룡리 서쪽에 있는 한절 마을에 예전에 한산사寒山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한절이 서쪽에 한절방죽이라는 소류지가 있다.

5) 백마산길

효자동 3가에 있는 백마산 길은 백마산 이름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효자 공원묘지와 그랜드 운전학원이 근처에 있다.

6) 속거길

속거길은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7) 만지길

만지길은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만지리晩止里는 만절리 또는 만산으로도 불리는데, 척골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만지리는 황방산의 남쪽 마지막 자락에 있는 복상산의 서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로 만지리의 서북쪽 골짜기는 가랏골이다.

효자공원묘지와 그랜드 운전학원이 근처에 있고 만절못이 있다.

계룡산 지역

계룡산 지역 이미지

1) 우림로

우림면은 본래 전주부 우림면지역이다.

1935년에 난전과 우림은 우전으로 통합되면서 계룡산 지역, 중인리 지역 그리고 난전들 지역 모두 우전면에 귀속된다. 우전중학교 부근의 삼천동과 효자동 일대가 우림면이었다.

2) 계룡산길

계룡산桂龍山은 삼천동 2가 지역에 있는 산으로 정동, 비아 등의 마을 뒷산으로 해성고등학교 뒤편에 있는 산이다. 계룡산 길은 계룡산의 이름을 도로명칭으로 부여(조선 태조가 이곳 산을 계룡산이라 불리었음)하였다.

계룡산 자락에 비아탁시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팽년과 그 후손들의 묘가 있는 지점이 까마귀의 머리에 해당하고 고개를 잔뜩 숙이고 두 날개를 구부려 막 내려앉으며 시체를 쫓는 형국이라고 한다. 대개의 경우 산의 모양이 완만한 것이 보통인데 비아동 뒤 계룡산은 마치 새의 날개를 반쯤 접은 것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어서 비아탁시의 상상을 믿을 만하게 만든다. 비아탁시가 어느 지관 한 사람의 상상력의 결과일지도 모르나 이후의 사람들에게 비아탁시는 땅에 대한 믿음과 후손이 번창하고 집안에 복이 들어오기를 기원하는 후손들에게 세세로 중요한 믿음의 뿌리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비아딱지라는 기이한 형태로 남아있기는 하나 땅에 대한 인식과 상상의 결과는 근원을 알면 반드시 그럴 것은 새로운 믿음을 낳게 한다.

계룡산길 지역은 구한말 전주군 우림면 지역으로 당시 우림면은 계용리와 안산리로 나뉘어 있었다. 계용은 계룡산의 계와 가용리의 용을 합하여 계용이라 하였는데 가용리는 지금의 비아동을 말한다. 계룡산 지역에 여러 마을이 있다. 함대와 용산, 정동과 비아, 그리고, 우묵실, 쌍자리, 장자리, 망월 지역 등이 계룡산 자락에 있다.

3) 정동길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 부여하였다. 정동井洞 마을은 계룡산 동쪽 자락에 남향으로 자리 잡은 마을로 원래 물이 좋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해성고등학교 쪽으로 넘어가는 골짜기를 진골이라고 부른다.

해성고등학교에서 금산사로 이어지는 712번 도로를 따라가다가 도로 위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4) 함대길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효자동에서 우림교를 건너 금산사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 함띠라고도 부르는 함대含帶마을이다. 풍취나대風吹羅帶형의 명당이 있다고 알려진 이 마을을 주민들은 ‘머금을 함’ 띠대‘ 즉 삼천천을 띠같이 머금고 있다고 해서, 함대, 함띠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712지방도로에서 함대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5) 용산마을길

삼천동 2가의 용산마을길은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용산리는 정동 북쪽 계룡산 줄기 너머에 있는 마을로 그 지형이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지키고 있는 구룡농주九龍弄珠, 또는 용이 구름 속으로 오르는 운붕발룡雲中發龍형이라고 한다. 용산 마을은 세 마을로 나눠지는데, 마을 입구에서부터 준뜸, 큰 돈에, 지와집뜸이 있다. 비와집골 바로 위에는 방죽이 있고, 방죽 위에 골짜기를 큰 골이라고 한다. 큰 골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고 해서 ’여동‘ 또는 ’여의동‘이라고 부른다.

전주농협공판장과 삼천천이 근처에 있으며, 용복동과 중인동을 지나 금산사로 이어지는 712 지방도로가 지난다.

6) 비아길

이 길은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했는데, 비아마을은 정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뒷산의 모습이 날아가는 까마귀와 비슷한 비아탁시飛雅啄屍형이라고도 부른다.

비아동은 일찍이 전주 유씨가 자리를 잡은 마을이라고 한다. 전주 유씨의 선대 중 누군가가 여막을 짓고 삼년을 공을 들여서 명당을 구하다가 모악산과 비아딱지에서 불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모악산으로 가는 도중에 그 불은 꺼져 버리고 비아딱지의 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아딱지에 묘를 썼다고 한다. 그 묘가 성균 생원 팽년(彭年)의 묘다.

팽년의 묘가 있는 자리는 풍수상 비아탁시라고 한다. 비아탁시(飛鴉啄屍)란 까마귀가 시체를 쪼기 위해 날아가는 모양이다. 제보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 까마귀가 노리고 있는 시체는 바로 ‘망월’과 ‘우묵실’ 사이로 뻗어내린 산줄기라고 한다.

해성고등학교 부근에 있는 마을이다.

7) 우목길

정동마을을 지나 만수동을 거쳐서 이어지는 우목실길은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 부여하였다. 우목리牛目里 또는 우목실이라고 부르는데, 마을의 뒷산이 우목형이라서 붙텨진 이름이라고 한다. 우묵실에서 삼천동 3가의 석산마을로 가는 고개가 석산재. 또는 석산채라고 불리는데, 우묵실쪽에서는 이 고개를 우묵실고개라고 부른다. 조그만 방죽 이름이 우묵실방죽이다.

우목실 마을 근처에 우목 저수지와 이목이재가 있다. 만수동에서 용강리를 지나면 712번 지방도로와 연결된다.

중인 지역

중인 지역 이미지

1) 중인길

중인길은 현재 행정동인 중인동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본래 전주군 난전면의 지역으로 새재봉 밑이 되기 때문에 새재비 또는 조숙리. 조숙봉鳥宿峯 또는 중인리라고 하였다.

이곳 중인동은 모악산 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모악산을 오르는 길이 몇 가지가 있다. 금산사를 거쳐 구이로 빠지는 길과 중인리로 해서 금산사로 가는 길이 있다. 그리고 전주 사람들이 즐겨 오르는 길로 구이에서 모악산 너머 금산사로 가는 길이 있다.

이 산의 정상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쉰질바위라는 커다란 바위의 모습이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 같아서 모악산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모악산은 김제군과 완주군에 걸쳐 있는 739m의 평지돌출의 산이다. 지금은 잔솔과 앉은뱅이 진달래, 머루, 다래, 으름, 벗나무, 상수리나무만 채워진 밋밋한 산이지만 예전에는 숲이 울창하고 산세가 수려해서 계룡산과 더불어 정기어린 산으로 어깨를 겨루던 산이었다. 1907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모악산은 호남사경이라 해서 봄의 경치로 모악산과 금산사의 춘경, 여름 경치로 변산반도의 하경, 내장사의 단풍과 백양사의 설경으로 이름이 높았다. 위대한 어머니의 산이라고 일컬어지는 호남의 명산 모악산 자락에 중인동이 자리 잡고 있다.

712번 국도에서 모악산 방향으로 중인리로 들어가는 길에 한국전통문화학교와 중인초등학교가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원중인 마을이다. 모악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모악산을 찾는 사람들의 출입이 잦은 곳이다.

2) 학전길

학전은 모악산의 한 자락인 팔학봉을 배경으로 한 마을이다. ‘팔학봉’은 ‘팔학지지(八鶴之地)’ 여덟 마리 학의 모양을 한 지형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별학지, 불무지, 돌꼬지, 돌모양지, 외나무다리 등이 그것인데 지금은 그 위치나 지형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으나 이전 시기 누군가는 이 마을을 여덟 마리의 학이 군무를 펼치고 있는 아름다운 땅으로 인식했던 셈이다. 지금은 ‘팔학봉’과 마을 사이에 전주 순환도로가 개설되어 팔학의 기운이 마을과 차단된 셈이다. 예전에 학전에서 팔학봉 쪽으로 깊숙하게 자리한 학야라는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학전으로 모두 통합되었다. 학전에는 전주 최씨와 김해 김씨가 주로 살고 있었으며 전주 최씨의 입향조는 전라감사를 지낸 최유경이라고 한다. 학전은 현재 정보화 마을로 지정되어 있고 마을 입구 새뚝끝 근방에 주말 농장을 운영하고 있어서 시내 사람들이 주말이면 자주 찾는 마을이 되었다. 새뚝끝은 앞은 예전에 방죽이었는데 지금은 매립하여 주말 농장을 찾는 사람들이 차를 받치거나 공사차량들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공터로 활용되고 있다. 정보화 마을과 참게쌀 그리고 주말 농장 덕택에 학전은 여느 마을에 비해 비교적 활기차 보이는 마을이 되었으며 마을 안에는 새로 지은 전원 주택들도 여러 채 들어 서 있다. 학전 역시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노령화 현상보이기는 하나 젊은 사람들과 부녀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무공해 채소 재배라든가 두부 만들기 등의 아이디어를 개발하여 주말농장을 찾는 시내 사람들과의 연계를 다각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3) 원당길

원당리는 김해 김씨, 전주 이씨, 전주 최씨, 밀양 박씨 등이 각성받이로 동네를 형성하여 살아온 마을이다. 원당리 마을 초입에 효열각이 있는데 전주 최씨 최기호의 부인 전주 이씨를 기린 제각이다. 원당 마을에서는 아래꺼티, 우꺼티, 새터로 마을을 삼분하여 부른다. 우꺼티에서 팔학봉 쪽으로 난 골짜기는 ‘웃골’이다. 마을 남서 간으로 당기미가 있으며 동북 간으로는 송정이라는 산이 있다. 그래서 원당은 송정을 뒤로 하고 당기미를 바라보며 동남간으로 앉은 마을이다. 마을 초입에 서낭댕이가 있고 그 맞은편에 금땅밭과 바우지가 있는데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원당에서 학전으로 넘나드는 길목을 시앙골이라고 하는데 마을 초입의 열녀각 앞으로 난 길이다. 신작로 쪽에서 학전을 가는 길목 중간부근에 대송배미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는 예전에 ‘쟁인’이 살았다고 하는데 ‘쟁인’은 마을 사람들이 아프면 굿을 해주고 마당에 널려 있는 것들을 자기 것으로 알고 다 가져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무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4) 추동길

추동은 한자의 뜻으로 보자면 가래나뭇골인데 마을 사람들은 예전부터 그냥 추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예전에 동네 가운데에 큰 소나무가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추동의 한자 의미와 소나무는 아무 관련이 없어서 이런 추정은 단지 추정에 불과하다. 동네 어귀에 가래나무로 만든 정자가 있는데 그 정자로 말미암아서 마을 이름이 붙었는지 그런 정자를 만들 정도로 가래나무가 많아서 동네 이름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마을은 웃뜸, 새터, 큰동네, 비선골 네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예전에는 피난골이라는 마을도 있었는데 집은 한 댓 가호 되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웃뜸은 강릉 함 씨들이 주로 살았으며, 새터, 큰동네, 비선골은 김해 김 씨가 판을 이루었다고 한다. 동네의 규모도 예전에 한 백호 정도 되었다고 하며 전주시 통계 자료 세대수가 지금도 98호로 되어 있어 마을 주민들 말마따나 촌 동네 치고는 큰 동네라고 할 수 있다.

동네로 들어가는 길이 두 군데가 있는데 동네를 기준으로 동쪽에 하나가 있고 또 하나의 길은 지금 시내버스가 다니는 길 동네의 남쪽으로 난 길이 있다. 동네로 들어오는 두 진입로 사이에 산이 하나 있는데 이 산이 관대봉이다. 동네가 관대봉에 완전히 가려져 있기 때문에 예전부터 이 동네는 피난처였다고 한다.

5) 모악산자락길

모악산자락길은 중인리 입구에서 시작해서 완산체육공원, 학전, 원당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를 말한다. 모악산(793.5m)은 충남 신도안, 영주 금계동과 더불어 명당으로 꼽히는 곳으로 증산도를 비롯한 여러 종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모악산에는 백제 법왕 1년(599년)에 창간된 금산사를 필두로 귀신사, 대원사, 수왕사 등의 절이 있기도 하다. 모악산이 거느리고 있는 산줄기들은 김제, 완주, 전주 지역에 걸쳐 있으며 광활한 호남평야의 젖줄인 구이저수지, 금평저수지 등과 불선제, 중인제, 갈마제 등도 모악산 자락의 물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모악산 정상에 올라서면 전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남으로 내장산, 서쪽으로 변산반도가 보인다. 모악산은 모름지기 전주, 완주, 김제 지역 사람들의 중요한 휴식 공간이 되고 있다. 모악산자락길은 모악산 주봉에서 독배에 이르는 산의 능선과 평행하게 형성된 도로이어서 모악산 상봉에서 서북방향으로 길게 펼쳐진 모악산 주능선을 따라 형성된 마을 사람들의 자취가 스며있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옛 마을길을 조성하여 관광객들을 유치하려는 노력이 지자체마다 이루어지고 있는데 모악산자락길 역시 그러한 가치를 지닐 만한 것을 감안하여 명명된 이름이다.

6) 신금길

신금길은 현재 중인리 마을 안쪽에 있는 신금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맹개라고도 부르는 신금마을은 신안 남쪽에 있는 마을로, 맹개 서남쪽에는 봉소리마을이 있다.

중인리에서 모악산 가는 길옆에 자리한 마을이 신금마을이다.

7) 상승길

금산사로 가는 712번 지방도로 옆에 있는 상승동이라는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상승동은 되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새재비 서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쌀을 되는 되(升)를 닮았다. 상승 동남쪽에서 새재비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를 무넹기재라고 부른다.

용복동의 황소리 안쪽에 있는 상승마을로 가는 길이다.

8) 망월길

망월길은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인 망월마을 때문에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서지동 동쪽에 있는 이 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옥토망월玉免望月형이라고 한다.

중인 삼거리 부근에 있는 마을인 망월마을에서 바라보면 모악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들판의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9) 원서지길

원서지길은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인 서지동 때문에 도로명이 부여되었다. 서지동西芝洞은 용복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신덕리 아래쪽에 있다.

구이와 이서간을 연결하는 도로 옆에 있는 서지동에서 내려가면 황소교를 만나게 된다.

10) 구덕마을길

구덕이라는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봉황산이라고도 부르는 구덕산 자락에 자리 잡은 구덕마을은 서지동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금산사로 가는 712번 지방도로 변에 있는 용복동의 봉암 마을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11) 독배길

독배길은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중인리 지나 금산사로 넘어가는 청도재를 넘어가기 바로 직전에 있는 마을로 봉황리 서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동쪽에 작은 독배산이 있으며 독배 근처 길가에 서낭당이 있었는데 길이 나면서 없어지고 말았다.

전주에서 청도재를 넘어 금산사 가는 길에 위치한 마을인 독배 마을에서 모악산으로 가는 등산로 변에 위치한 길이다.

쑥고개 지역

쑥고개 지역 이미지

1) 쑥고개로
- 기점 : 용복동 229-2
- 종점 : 효자2가 221-7
  • 쑥고개로 명칭부여의 유래 및 의의
    쑥고개로는 효자동 2가에서 비롯되어 용복동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쑥고개는 숯재, 탄치, 숙호재, 숙호치라고도 부르는데, 삼천동 서남쪽에서 김제군 금구면 오봉리 동북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중턱에 있는 바위가 호랑이 같이 생겼다. 예보부터 이어져온 고개 이름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 쑥고개로 주변의 환경
    시내에서 김제시 금구면으로 이어지는 쑥고개로 우측에 동암고등학교가 있고, 바로 그 옆에 전라북도 교육청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전주역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옆에는 전주국립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교육환경과 문화 환경이 우수한 곳이 바로 쑥고개로 근처이다.
2) 쑥고개옛길

쑥고개 옛길은 삼천동 3가에서 용복동에 이르는 길로 예로부터 전주와 김제를 잇는 길목이다. 숯재, 탄치, 숙호재, 숙호치라고도 부르며, 삼천동 서남쪽에서 김제군 금구면 오봉리 동북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중턱에 있는 바위가 호랑이 같이 생겼다. 원래 부르던 고개 이름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하였다.

3) 삼산길

삼천동 3가에 있는 삼산길은 삼동리 서북쪽에 있는 삼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삼산三山은 동남쪽을 제외한 동북쪽, 서북쪽, 서남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동북쪽에 있는 산이 닷금산인데, 닥금산, 박금산이라고도 부른다. 닷금산은 ‘금이 단돈만 한 게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닷금산 자락에는 조선 인조 때 현감과 사간을 지낸 이흥발의 묘가 있다. 마을을 산이 에워싼 형국으로 삼산은 그 형세가 소가 누워 있는 와우형이라고 하며, 안산 마을에서 삼산에 이리는 골짜기는 소뿔에 해당하는 각골이다.

전북신학대학과 완산고등학교가 인근에 있고, 정여립로가 근처를 지난다.

4) 자구실길

자구실길은 현재 능안 남쪽에 있는 자고실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자고실에서 쑥고개길로 뻗어 내린 산자락에 거북바위가 있었으나, 한절이 사람들이 시주 온 중에게 해꼬지를 해서 중이 거북바위를 훼손시켰다.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옛날 김제로 이어지던 쑥고개 길이 근처에 있다.

5) 중앙반길

중앙반길은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목포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1번 국도가 마을을 지나고 중앙반길을 따라가면 모과동이다.

6) 석산마을길

석산길마을은 호동 남쪽에 있는 석산石山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바위가 많은 골짜기에 있어서 석산이라고 불리는 이 마을은 아랫동네와 윗동네로 나뉜다. 웃 석산 위에 있는 골짜기로 넘어가는 고개가 삼천동 2가의 우묵실로 넘어가는 우묵실고개이다.

1번 국도와 정여립로가 지나는 곳의 남쪽에 자리 잡은 석산마을길을 따라가면 석산저수지가 나온다.

7) 모과길

삼천동 3가에 있는 모과길은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모과동은 모래개, 모개라고도 불리는데, 장재울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풍수지리설에 호동에 살고 있던 범이 이곳의 개를 몰아서 쑥고개로 보내는 형국이라고 한다. 모과동 동쪽에는 모과동 방죽이 있고, 모과동과 호동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면 석산이다.

1번 국도 남쪽 정여립로 부근 모과마을에 있는 길이다.

8) 원신덕길

신덕길은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신덕리는 서장 동쪽에 있는 마을이고 신덕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인 서당골은 예전에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용독동에서 구신덕저수지를 지나면 나타나는 마을이 원신덕 마을이다.

상림 지역

상림 지역 이미지

1) 정여립로
- 기점 : 석구동 614-1
- 종점 : 만성동 3-4
  • 정여립 로 명칭부여의 유래 및 의의
    정여립로는 석구동에서 만성동으로 이어진 길로 장장 3십리쯤 된다. 전주에 살았던 정여립이 낙향하여 대동계를 조직했던 김제시 금산면 제비산 자락으로 가던 길목에 자리 잡은 길이 정여립로이다. 조선시대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며 혁명가로 알려진 정여립은 전주 사람이다. “동 .서인을 막론하고 ”넓게 배우고 들은 것이 많아서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정여립은 조선 최대의 역모사건인 기축옥사의 주인공으로 의문사하고 말았다. 그 뒤 기축옥사와 정여립에 관한 것들은 여러 문헌이나 백과사전 등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여립(鄭汝立 ~1589~선조22) 조선 중기의 모반자. 자는 인백(仁伯)이고, 본관은 동래(東萊)로. 전주 출신이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으나 성격이 포악 잔인하였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이․성혼의 문인.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으로 퇴관하였다. 본래 서인(西人)이었으나 집권한 동인(東人)에 아부, 죽은 스승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성혼 등을 비판하여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자 정권을 넘보아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 신분에 제한 없이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1587년 전주 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대동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중 의연(依然) 등의 기인모사를 거느리고《정감록(鄭鑑錄)》의 참설(讖說)을 이용하는 한편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1589년(선조 22) 거사(巨事)를 모의, 반군을 서울에 투입하여 일거에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안악 군수 이축(移築)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진안 죽도로 도망하여 숨었다가 잡히자, 관군의 포위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 기축옥사가 일어나 일천여명이 희생되었고,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그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사마공(司馬公)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위(魏)나라를 정통(正統)으로 삼은 것은 참으로 직필(直筆)이다. 그런데 주자(朱子)는 이를 부인하고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삼았는데, 후생(後生)으로서는 대현(大賢)의 소견을 알수 없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요(堯)․순(舜)․우(禹)가 임금의 자리를 서로 전했는데, 그들은 성인(聖人)이 아닌가? 또 말하기를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한다고 한 것은 왕촉(王蠋)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현(聖賢)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혜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는 성인 중에 화(和)한 자가 아닌가? 맹자(孟子)가 제(齊)나라, 양(梁)나라의 임금에게 천자(天子)가 될 수 있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권하였는데, 그는 성인 다음 가는 사람이 아닌가?”
    이를 풀어 말하면 “위나라의 조조가 정통이지 촉나라의 유비는 틀린 것”이며 따라서 유비를 정통이라고 주장한 주자(朱子)를 싸잡아 비난한 것이다. 또한 그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닌 것처럼 귀천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했으며 천하는 백성들의 것이지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는 없으며 누구든 섬기면 임금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보다 50년 앞선 공화주의자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정여립의 사상은 그 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호민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정약용의 <탕무혁명론>으로 이어졌으며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으로 분출되었다.
  • 정여립로 주변의 환경
    석구동의 신평에서 시작된 이 길은 삼천을 건너 해성고를 지나고 쑥고개길을 지나 좌측으로 국립전주박물관을 지난다. 좌측으로 삼산지와 안심제를 지나 전주교통방송까지 이어지는 길이 정여립로이다.
2) 원상림길

전주에서 이서로 가는 716번 지방도로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원상림길은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원래 전주군 이남면의 지역이었다.

전북 가축위생사업소가 이 716번 지방도로옆에 있고, 마을을 따라가면 안심저수지가 있다.

3) 효성길

상림동의 효성길은 현재 자연마을의 명칭으로 도로명을 부여하였다.

만성 지역

만성 지역 이미지

1) 원만성길

정여립로에서 만성동으로 이어지는 길이 원만성길로 원래의 이름을 따라 지었다. 만성리는 원래 전주군 이동면의 지역으로 만성이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흥리 월평리 신성리 두현리 용흥리 냉정리 신등리 일대와 이남면의 신곡리 안심리 일부를 병합하여 조촌면에 편입되었다.

2) 월방길

정여립로에서 만성동으로 이어지는 월방길은 지명을 따서 지었다.

3) 두현길

정여립로에서 상림동으로 이어지는 두현길은 원래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4) 만성용흥길

정여립로에서 상림동으로 이어지는 만성용흥길은 원래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5) 장동길(원장동길, 장동안길)

혁신도시 근처 장동마을에 있는 원장동길과 장동안길은 원래의 이름을 따서 지엇다.

6) 용정길

용정길은 원래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7) 용기길

만성동 복합단지 예정지부근에 있는 용기길은 원래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8) 정암길

온고을로에서 장동마을로 이어지는 정암길은 원래 부르던 지명을 사용하였다.

9) 장동유통로
- 기점 : 장동 772-11
- 종점 : 장동 1024-1

1번 국도와 20번 국도를 연결하는 장동유통로는 장동에 위치한 도로로 특정한 지역적 특성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원래 전주군 아동면 지역으로 장씨가 살았으므로 장동이라고 하였다. 장동에 대형 유통단지가 들어서고 특정한 지형지물과 법정동명을 활용하여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장동 유통단지가 들어서고 전주 월드컵 CC가 있으며 월드컵 경기장이 길 옆에 있다. 장도유통로를 따라가면 전주 IC로 연결 된다.

10) 재방마을길

온고을로에서부터 시작되는 재방마을길은 원래의 지명을 사용하였다.

11) 영동길

재방마을길에서 호남고속도로쪽으로 이어지는 영동길은 원래의 지명을 시용하였다.

팔복 지역

팔복 지역 이미지

1) 팔복로(길)
- 기점 : 팔복동2가 72-3
- 종점 : 여의동 141-1

전주천에서 팔복동을 가로 질러 여의동까지 이어진 팔복로는 예로부터 사용된 지명을 명칭으로 길 이름으로 부여하였다. 1957년 11월 6일에 전주시 구역 확장에 의하여 완주군 조촌면의 동곡리, 돈산리의 일부와 신복리 , 여의리의 일부 그리고 유제리를 편입하였다. 같은 해 12월 12일, 전주시 조례 제 108호에 의하여 팔과정과 신복리의 이름을 따서 팔복동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 유래를 잘 못 아는 사람들이 여덟 개의 복福이 있어서 팔복이라고 여기는데, 두 개의 머리글자를 따다 보니 팔복동이 된 것이다.

전주공업단지가 펼쳐진 곳이 팔복로 주변이다. 팬 아시아 페페 코리아와 팬 아시아 종이 박물관을 비롯하여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2) 팔과정로
- 기점 : 팔복동3가 402
- 종점 : 팔복동4가 998-11

전주천에서 온고을로로 이어진 팔과정로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정자인 팔과정을 길의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팔과정은 동곡리와 반룡리 사이에 세워진 정자로 조선 인조 때 판교 홍남립, 사간 이홍발, 목사 이흥록, 필선 이기발, 장령 이후선, 진사 이생발, 이순선, 송상주 등 선비 8명이 함께 세웠다. 원래의 정자는 없어졌지만 팔복정수장이 들어온 이후 전주시에서 다시 세웠다.

누정(樓亭)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명칭으로서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루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식의 집이다. 이규보가 지은「사륜정기(四輪亭記)」에는 “사방이 확 트이고 텅 비어 있으며 높다랗게 만든 것이 정자”라는 설명이 나온다. 또한『신증동국여지승람』의 ‘누정조’에 의하면 누정은 루(樓), 정(亭), 당(堂), 대(臺), 각(閣), 헌(軒), 재(齋) 등을 통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본래 그 명칭들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16세기 선비들에게는 그런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 ‘재’는 수신 또는 개인적인 학문 연구공간으로서 사방을 벽으로 둘러싼 폐쇄적인 형태이며, ‘정’은 길 가던 사람이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고 ‘당’은 터를 높이 돋우어 우뚝한 모습의 건물이다. 또한 정사(精舍)라는 명칭도 있는데 이것은 후진들을 모아서 학문을 강론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정자는 그 규모가 작은 건물을 말하는데 ‘대’와는 달리 건물에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경상도 함양 지방을 비롯한 남부 지방에서는 가운데쯤에 방 한간을 들여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지어진 정자가 함양의 농월정(弄月亭: 2003년 가을에 화재로 소실), 거연정(居然亭), 담양의 환벽당(環碧堂)이나 명옥헌(鳴玉軒)을 비롯한 여러 정자 들이다. 이러한 정자는 대개 놀거나 풍류를 즐길 목적으로 지어졌는데 정각(亭閣) 또는 정사(亭榭)라고 부르며 산수가 좋은 곳에 세운다. 사(榭) 역시 높은 언덕이나 ‘대(臺)’ 위에 지은 정자를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이렇듯 누정은 마을 안이 아니라 경승지에 풍류를 곁들인 휴식공간으로 특별하게 지은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지형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방이 탁 트여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지었다. 다음은『동문선』에 실린 이규보의「사륜정기(四輪亭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름에 손님과 함께 동산에다 자리를 깔고 누워 자기도 하고 혹은 앉아서 술잔을 돌리기도 하고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며 뜻에 맞는 대로 하다가 날이 저물면 파하니, 이것이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햇볕을 피하여 그늘을 찾아 옮기느라 여러 번 그 자리를 바꾸게 되므로 그 때마다 거문고, 책, 베개, 대자리, 술병, 바둑판이 사람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지므로 잘못하면 떨어뜨리는 수가 있다.

여름 한낮에 손님이 찾아오면 정자로 가서 더러는 자기도 하고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는 데, 경치를 바라보는 데는 좋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햇볕 때문에 자꾸 옮겨다니니다 보니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방이 트인 시원한 정자에 올라 시간을 보낸다면 그런 불편은 없을 것이다.

중국 송나라 때의 『영조법식(營造法式)』이라는 문헌에는 “정은 백성이 안정을 취하는 바이니 정에는 누가 있다. 정은 사람이 모이고 머무르는 곳”이라는 기록이 있고, 『후한서』의「백관서」에는 “여행길에 숙식시설이 있고 백성의 시비를 가리는 곳이 정”이라고 하였다.

이규보는 정자의 기능을 손님 접대도 하고 학문을 겸한 풍류를 즐기는 곳으로 보았다. 그는 정자에는 여섯 명이 있으면 좋다고 하였는데, “여섯 사람이란 거문고를 타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시에 능한 스님 한 사람, 바둑을 두는 두 사람, 그리고 주인까지”였다.

전주 지역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정자나 누각이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팔과정은 의미가 남다른 정자라고 볼 수 있다.

팔복 정수장이 바로 근처에 있고, 팔복동과 마찬가지로 공장지대에 위치해 있다.

3) 신복로(길)
- 기점 : 팔복동1가 56-2
- 종점 : 팔복동4가 126-23

팔복동 1가에서 팔복동 4가 로 이어진 신복로는 옛부터 사용하던 지명을 명칭인 신복리의 이름으로 부여하였다. 신복리는 추천대교에서 구 팔달로를 따라 북쪽으로 500여m쯤 떨어진 동쪽의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원래 완주군 조촌면 지역이었다가 1935년에 전주시로 편입되었고, 1957년에 팔복동 1가로 전주시에 편입되었다. 이 근처는 온전하게 평야지대였는데, 가리내의 서쪽 지역까지는 온통 채소밭이었다. 지금은 전주공업단지에 편입되어 옛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팔과정로와 추천로를 연결하는 이 도로는 전주천과 전주공업단지에 인접해 있고 농어촌 개발공사와 삼선냉장이 있다.

4) 신복천변로(길)
- 기점 : 팔복동1가 305-3
- 종점 : 팔복동1가 224-17
  • 중소기업청에서 삼선냉장 쪽 전주천으로 이어진 팔복동 1가의 신복 천변로는 옛부터 사용하던 신복리마을 명칭과명 가리내 천변부근의 이름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 신복천변로 주변 환경
    중소기업청에서 삼선냉장이 근처에 있다.
5) 추천로(길)
- 기점 : 팔복동3가 산240-1
- 종점 : 팔복동4가 969-8

추천로는 팔복동 3가에서 팔복동 4가에 이르는 길로 예로부터 사용하던 지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삼천천과 전주천이 합쳐지는 지역을 가르내, 가리내 또는 추천이라고 하였다. 이곳의 여울을 가리내 여울이라고 하였으며 예전에 이곳에 추천원이라는 원집이 있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이나『대전회통(大典會通)』등 조선시대 법전을 보면 “원(院)은 지방의 수령이 부근의 주민을 정하여 원주(院主)로 삼고 이를 보수시키며 직산에서 전주에 이르는 길은 중로 3호를 원주로 삼고 나머지 소로에는 2호를 원주로 삼는다. 원주로 정한 집은 잡역이 면제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원에는 대개 주막거리가 있었다. 가리내 동쪽에 있던 대를 추천대라고 하였는데 이곳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4백여 년 전 현재 하가마을에 전주이씨들이 집단으로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생활을 어려웠지만 우애와 효성이 지극했다. 이 때 이곳에 살고 있던 추탄楸灘의 부친 달성공達城公이 중병으로 몇 달 째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위독해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아버지의 위급함을 목격한 추탄이 인근 비석날(현재 팔복동 버드랑주)에 거주하고 있는 명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 약을 지어 가지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뇌성벽력을 치며 폭우가 쏟아져 내려 삽시간에 전주천이 범람하고 말았다.

낙담한 추탄이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데 강물에 위급한 아버지의 얼굴이 어른거리자 앞 뒤를 가릴 것 없이 홍수로 넘실대는 전주천에 뛰어들고 말았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제방을 넘실거리던 물살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조선 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런 저런 상황을 따질 사이도 없이 추탄은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와 숯불에 약을 정성스럽게 달려 촌각을 다투는 아버지의 입술을 적셔드리자 잠시 후 전신을 흥건하게 적시는 땀을 흘리고 마침내 깨어나는 것이었다.

큰 홍수로 넘실대던 냇물은 추탄이 건너간 뒤 다시 합쳐져 흐르므로 그의 지극한 효성을 하늘이 도왔다는 인근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추탄의 효행에 감탄한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서 나무다리를 만들고서 추탄교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냇물이 갈라진 윗마을을 상가르내, 아랫마을을 하가르내라고 부르고 있다. 전주 이씨 추탄파楸灘派 문중에서 고종 3년에 세운 추천대를 세웠으며, 추천과 소양천이 만나 만경강이 된다.

전주천 서쪽에 자리 잡은 추천로 일대는 공단이 펼쳐져 있고, 추천대교에서부터 전라선 철교를 지나 고랑동에 이르는 구간 역시 전주천을 따라 간다.

6) 상리로(길)
- 기점 : 팔복동2가 177-16
- 종점 : 팔복동2가 799-51

상리로는 팔복동 2가에서 3가까지 이어진 길로 옛부터 사용하던 지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팔복동 중심에 있던 상리마을은 풍수지리상 원래 배의 형국이라고 한다. 예전에 상리. 중리. 하리가 있었다고 한다. 중리는 마을 자체가 없어졌는데, 지금의 BYC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하리는 신복리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이 일대에 혼마식품과 팔복초교가 있으며, 농수산물 유통공사가 있다.

7) 구렛들길

팔복동 1가에 있는 구렛들 1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지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매화동에서 비석날 사이가 큰 들판이었는데, 그 들판을 구레렛들이라고 불렀다. 매화동에서 상리에 이르는 주변의 논은 ‘비가 안 오면, 모를 못 심었기 때문에 ’봉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주 제 1공단이 들어서면서 구렛들과 팔복동 1가의 냇뜰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삼양사와 한솔제지가 들어섰던 곳이 바로 구렛들이었다. 구렛들에서는 구주리 남쪽의 가리내에 있는 금액보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이 금액보물은 팔복동의 신복리 앞을 지나서 김제의 용덕 백구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금액보는 금액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8) 야전길

팔복동 4가에 있는 야전 1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 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는데, 들에 밭을 일구고 살았다고 하여 야전마을이다.

9) 감수길

감수길은 원래의 지명에 따라 지었다.

10) 심감길

심감길은 원래의 지명을 따라 지었다.

11) 신행로
- 기점 : 팔복동3가 410-3
- 종점 : 팔복동2가 419-3

팔복동 3가와 팔복동 2가를 잇는 신행로는 택지개발 이전에 사용되던 마을 이름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버드랑죽 동남쪽에 있던 신행리는 현재 전주공업사가 있던 자리의 마을이다.

휴비스와 중소기업청이 은근에 있다.

12) 구주길

구주길은 원래의 지명에 따라 지엇다.

13) 덕촌길

덕촌길은 원래의 지명에 따라 지었다. 감천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 덕촌이다.

14) 동곡로(동곡안길)
- 기점 : 팔복동2가 436-6
- 종점 : 팔복동2가 339-2

동곡로는 팔복동 2가와 3가를 잇는 도로로 옛부터 사용하던 지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동곡리는 황토백이에서 비석 날까지 이어지는 들녘에 자리 잡고 있다. 반룡리와 상리 사이를 동곡리라고 하였으며 모두 여덟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황토백이에서 팬 아시아 페이퍼 코리아 앞에서 모나리자로 이어지는 도로 동쪽과 모나리자에서 유상리(팔달로에서 동산촌으로 이어지는 삼거리)에 이르는 남쪽 유상리 앞 남쪽에서 추천대교까지의 도로 서쪽이 동곡리 지역이다.

남양과 휴비스 등 여러 공장들이 이 길 주변에 있다.

15) 반룡로(길)
- 기점 : 팔복동2가 511-2
- 종점 : 여의동 739-6

반룡로는 팔복동 2가에서 여의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옛부터 사용하던 지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반룡리는 반룡리의 앞산, 즉 비석날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용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 반룡마을은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인데, 전주 공단 개발로 인하여 머리 부분이 잘려나가 반만 남아 반룡리半龍里라는 설이 있고, 반룡의 반은 발發이고, 용이 올라가서 발룡리라는 설이 있으며, 마을이 용을 떠 받치고 있어서 발룡리라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전주의 오룡 (용흥,와룡,용소,반룡,회룡) 중 에 한곳이며 용이 승천한다고 하여 반룡이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지역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용이 올라가고 그 자리에 정수장이 들어선 것으로 보아 발룡리가 맞을 것이라고 한다.

반룡저수지와 현대자동차서비스그리고 공무원교육운이 근처에 있다.

16) 학신길

학산길은 원래의 학산마을 이름을 따서 지었다.

17) 예암길

예암길은 원래 비석날 부근의 마을이름인데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

18) 원만성로
- 기점 : 팔복동3가 402-1
- 종점 : 팔복동2가 663-5

원만성로는 팔복동 3가에서 2가를 잇는 도로로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인 원망성 이름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원망성로 주변에는 크고 작은 공장들이 늘어서 있다.

19) 운암로
- 기점 : 팔복동2가 645-2
- 종점 : 팔복동2가 660-1

운암로는 팔복동 2가에 있는 마을로 팔과정에서 학문을 연구하여 장원급제한 운암 이흥발 (李興浡) 1600~1673) 을 기리기 위해 명칭을 부여하였다.

조선 중기의 지사(志士)인 이흥발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자는 유연(油然)이고, 호가 운암(雲巖)이었던 이흥발은 1624년(인조 2)에 생원이 되고 1628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36년 청(淸)나라 사신이 와서 화친(和親)을 청하자 척화(斥和)를 주장하는 소(疏)를 올리고 낙향하여 명(明)나라를 위해 절개를 지키며 일생 동안 학문을 닦았다.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죽은 뒤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운암일고(雲巖逸藁)》가 있다.

휴비스와 중소기업청이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20) 서귀로
- 기점 : 팔복동 2가 381-2 여의동 771
- 종점 : 여의동 777

팔복동 2가에서 여의동에 이르는 서귀로는 역사적인 인물인 서귀(西歸) 이기발李起渤의 이름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기발은 본관이 한산(韓山)이고, 자는 패우(沛雨). 호는 서귀(西歸)다. 1618년(광해군 10)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여 서궁(西宮)에 유폐하자, 국모(國母) 없는 나라라 한탄하며 은퇴했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에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했다.

1627년(인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필선(弼善)이 되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형 흥발(興浡), 군수(郡守) 최온(崔蘊) 등과 근왕병(勤王兵)을 모집, 청주를 거쳐 서울에 진격했으나 화약(和約)이 성립되어 전주에 돌아가 만년을 보냈다. 조정에서 여러 벼슬을 내렸으나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고 속마음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신이 받은 과거 합격중인 백패에서부터 하대부 벼슬 임명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명나라의 연호가 적여 있으니 신은 명나라만 있는 줄 알 따름입니다.” 이기발은 현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고 1744년(영조 20)에 그가 살던 마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전주 환경청과 운전면허시험장이 있으며, 여러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21) 유제로
- 기점 : 여의동 837
- 종점 : 팔복동2가 655-4

유제로는 여의동에서 팔복동 2가를 연결하는 도로로 자연적 또는 지형적 특성을 반영하여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버드나무가 많이 있는 방죽을 버드랑방죽 또는 유제리라고 하였다. 유제리는 본래 전주군 조촌면 지역으로 1914년에 덕촌리, 감천리, 신행리, 유제리를 병합하여 유제리라고 하였는데, 황방산에서 팔복동 2가의 유상리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동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구 한솔제지 앞에서 예암리에 이어지는 도로가 팔복동 2가와의 경계이다. 그러나 유제리는 전주 제 1공단이 들어서면서 마을 자체가 해체되고 말았다.

유제로 부근에 전주환경청과 운전면헤 시험장이 부근에 있다.

22) 유상로
- 기점 : 팔복동2가 676-20
- 종점 : 팔복동2가 774-92

유상로는 팔복동 2가에 있는 도로로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유상리는 반룡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1914년에 동곡리에 편입되었다. 1973년에 팔복동에 편입되었다.

전주공업고교와 공무원교육원이 근처에 있다.

23) 비석날로
- 기점 : 여의동 857-3
- 종점 : 팔복동2가 616-26

여의동과 팔복동을 잇는 비석날로는 옛부터 사용하던 지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비석날은 학상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옆에 비석이 서 있는 산등성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유제리에서 뻗어 내린 비석날에는 동쪽에 두 개 마을, 서쪽에 두 개 마을, 모두 4개의 마을이 있었다.

농협 하나로 클럽과 전주환경청이 근처에 있다.

24) 양마로
- 기점 : 여의동 871-27
- 종점 : 여의동 543-16

여의동에 있는 양마로는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 이름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는데, 양마마을은 파철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농협하나로 클럽과 현대자동차 서비스등이 있다.

25) 화개길

화개길은 양마리 남쪽에 있던 화개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26) 여산로
- 기점 : 여의동 1001-4
- 종점 : 고랑동 736-21

여산로는 여의동과 고랑동을 잇는 도로로 여의동과 동산동의 법정동 명칭을 활용하여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동산동의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반월 지역

반월 지역 이미지

1) 반월로(길, 원반월길, 원반월안길)
- 기점 : 반월동 626-20
- 종점 : 반월동 612-115

반월동에 있는 반월로는 옛부터 사용하던 지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이곳의 지형이 반달처럼 생겨서 반월이라고 불리었다. 이 지역에 예로부터 운중반월형의 명당 자리가 있다고 전해져 왔다.

1번 국도와 동부대로, 그리고 쪽구름로를 잇는 이 도로 옆에 전주 Ic가 있다.

2) 쪽구름로(길)
- 기점 : 동산동 518-2
- 종점 : 반월동 626-30

쪽구름로는 동산동에서 반월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옛부터 사용하던 지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본래 전주군 조촌면의 지역으로 인근지역에서 봤을 때 마을 위에 조각 구름이 걸친 것 같은 형태이고, 운중반월형의 명당이 있다는 곳이다. ‘쪽구름‘ 편운片雲, 동산, 동산촌 등의 마을이름으로 불리었다.

동산동의 중심지를 따라가는 이 도로 옆에 조촌초교와 우석중고가 있으며, 이 길이 익산 군산으로 이어진다. 근처에 호남제일문과 남양 제일 아파트가 있다.

3) 편운로
- 기점 : 동산동 697
- 종점 : 고랑동 814-29

동산동과 고랑동을 잇는 편운로는 옛부터 사용하던 지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지형이 조각구름같이 생겼고, 운중반월형의 명당이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우석중고교가 바로 인근에 있다.

4) 덕용길

옛부터 사용하던 자연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고, 덕용마을 명칭을 반영하였다. 우석중고교가 바로 인근에 있으며 여러 아파트 단지가 이어져 있다.

5) 원고랑길(원고랑안길)

고랑리는 본래 전주군 조촌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호랑이처럼 생겼으므로 지은 이름이다. 그 이름이 변하여 고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원래의 지명을 길 이름으로 정했다.

6) 한내로
- 기점 : 고랑동 1180-2
- 종점 : 팔복동 4가 969-24

고랑동에서 팔복동으로 이어지는 한내로는 고랑동과 팔복동을 잇는 도로로 옛부터 사용하던 지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전주천과 삼천천 그리고 만경강의 본류인 고산천이 만나는 지역을 한내 또는 큰내라고 하였다. 한내에는 완산 팔경의 하나인 대천파설과 비비낙안이 있었다. 한여름에 눈빛같이 시원하게 부서져 내리는 물결과 가을 달밤에 갈대꽃이 핀 모래 벌에 사쁜히 내려앉은 기러기 떼가 그것들이었다. 지금은 사라졌다가 다시 세워진 만경강 건너의 머리바위에 있던 비비 정에 올라 굽어 내려다보면 배꽃같이 날려 천 쪽 만 쪽 부서져 내리던 달빛의 정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고 한다. 저녁이면 모랫벌을 끼고 고기잡이 불을 밝힌 채 참게를 잡던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시켰다고 한다. 맛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해서 참게다리 하나면 고봉밥을 비웠다던 참게가 즐비했다던 한내의 이름을 딴 도로다.

고랑리에서 평리 삼화마을을 따라 전주천을 따라가는 도로다.

7) 신흥로

원래 있던 마을이름으로 길 이름을 지었다.

8) 여암길

반월동에서 여의동으로 이어지는 여암 1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본래 전주군 이동면의 지역으로 여의주 같은 바위가 있으므로 여의 또는 여이, 여암마을이라고 하였다.

9) 여실길(작은여실길)

반월동의 여실길(작은여실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1번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10) 서당길(서당안길)

사당터 동쪽에 있는 서당마을 이름을 길 이름으로 지었다.

11) 용정서원길

동부대로에서 용정동으로 이어지는 용정서원길은 서원이림을 따서 지었다.

12) 용신길

번영로에서 용정서원길로 이어지는 용신길은 원래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13) 용암길(용암안길)

용신경로당 근처에 있는 용암길은 마을 이름을 따서 지었다.

14) 암실길

암실길은 원래 이름을 따서 지었다.

15) 신중길

중리의 서쪽을 이루고 있는 서금매 마을은 새로 이룩한 마을로 신중길이라는 이름은 원래의 마을이름인 신중리에서 따서 지었다.

16) 구중길

중리의 동쪽을 이루고 있는 오래된 마을이 구중마을이다. 길 이름은 마을 이름을 따서 지었다.

17) 춘평마을길

원래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18) 신흥로
- 기점 : 고랑동 287-24
- 종점 : 고랑동 7-16

신흥로는 고랑동에 있는 도로로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고랑리 동북쪽에 새로 생긴 마을을 신흥마을이라고 하였다.

인근에 전라선 철교가 지나고 동쪽으로 전주천이 흐른다.

19) 평리마을길

원래의 마을 이름을 따서 지었다.

20) 원화전길

원래 만경강변에 꽃이 많이 피는 지역이라 화전이라 지엇고 원래의 이름을 길 이름으로 지었다.

21) 화전신평길

화전 서쪽에 있는 마을이 신평마을로 원래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22) 화전신정길

화전 동쪽에 있는 신정마을이름으로 길이름을 지었다.

23) 방초길

여암 동쪽에 있는 마을인 방초동의 이름으로 길 이름을 지었다.

원동 지역

원동 지역 이미지

1) 원동로(원동마을길)

원동로는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원동리는 원래 조선시대에 허고원虛高院이 있어서 원골 또는 원동이라고 하였다. 원동 동북쪽에 있는 논을 둠벙배미라고 부르는데, 밭 가운데 있어서 물이 잘 안 빠지기 때문에 둠벙처럼 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동 동쪽에 둔덕산이라는 산이 있다. 옛날 어느 선비가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이곳에서 쉬다 잠시 낮잠을 자는 중에 꿈을 꾸었다. 과거를 보러 갔다가 돌아간 뒤에 천금을 얻게 될 것이라는 꿈이었는데, 그 뒤 옥동자를 낳아 대성하였다는 것이다.

원동의 중심지인 원동마을에 있는 길이다.

2) 원동회룡길 (회룡길)

회룡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원동 동남쪽에 있는 회룡마을은 근처에 있는 산들이 모두 이곳으로 머리를 두고 있어 용이 꼬리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원동의 회룡길은 완주군 이서면과 경계에 있다.

3) 구사길

구사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원동 서남쪽에 있는 구사동은 마을 뒷산에 구룡구사九龍九巳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완주군 이서면 반교리 초남이 성지 부근에 있는 길이다.

4) 탑동길

원동에 있는 탑동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탑동마을은 텃샛골로 부르기도 하는데, 마을 뒷산에 효자탑이 있었다고 한다.

완주군 이서면 반교리와 경계에 있는 길이다.

5) 팔선길

팔선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팔선동은 하회리下會里라고도 부르는데, 원동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주변의 산이 봉우리가 여덟 개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서 용진간 지방도로 옆에 있는 팔선동에 있다.

6) 부동길

부동釜洞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부동마을은 정암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가마솥 모양으로 생겼다고 한다.

호남고속도로 변에 위치한 부둥마을 옆에 장동유통단지와 전주수목원이 있다.

7) 청복길(청복안길)

청복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26번 전주 군산 간 도로변에 위치한 길로 남정교회와 전주 수목원 사이에 있다.

8) 남정신기길(남정신기안길)

남정신기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남정동의 신기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본래 김제군 모촌면의 지역인데, 재남과 신정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남정리의 신기촌은 당마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남정교회가 인근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마산천이 흐르고 있다.

9) 당마길(당마안길)

당마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당마골은 남정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신기촌에서 당마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당마골재이다.

신기와 도로 사이를 두고 마주한 도로다.

10) 덕동길

덕동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덕동마을은 장똘 마을이라고도 부르는데, 장들은 덕동 서쪽에 있는 들이다.

백구평야가 펼쳐져 있고 마산천이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11) 재남길

남정동에 있는 재남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재남마을은 당마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고 당마골 가운데에 천씨千氏 효열문이 있다.

재남길은 완주군 이서면 반교리에 인접해 있다.

12) 성곡길

원래의 마을 이름을 가지고 길 이름을 지었다.

13) 용덕길

원래의 마을 이름인 용덕마을 이름을 길이름으로 지었다.

14) 대정길(대정안길)

성덕동의 대정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15) 매암길(매암안길)

매암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매암梅岩마을은 청복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매화낙지형의 명당자리가 있다는 곳이다. 매암 북쪽에 있는 골짜기는 예전에 부처가 있어서 부지당골이라고 부른다.

남정동과 성덕동 사이에 있는 길이 매암길이다.

16) 원성덕길(원성덕안길)

원성덕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존래 전주군 이북면의 지역으로 언덕이 되므로 성덕이라고 하였다. 성덕 북쪽에 있는 산이 삼덕산이다.

전주 군산간 20번 도로 근처에 있는 길이다.

17) 이작길

남정동에 있는 이작길은 26번 국도변에 위치해 있다.

이작伊作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이작은 당마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이작 북쪽에 있는 보가 산덕보이다.

18) 굴신길

원래 있던 아믈 이름을 가지고 길 이름을 지었다.

19) 신성길(신성안길)

신성마을 이름을 가지고 길 이름을 지었다.

20) 오신길

오신마을 이름을 가지고 길 이름을 지엇다.

21) 곡천길

곡천이라는 원래의 마을 이름을 가지고 지었다.

22) 고잔길

고잔 마을 이름을 따서 지었다.

23) 통계길

만경강 남로 부근에 있는 이 길은 원래의 지명에 따라 지었다.

24) 도강길

만경강 남로에서 번영로로 이어지는 도강길은 원래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25) 신유강길

전주시 강흥동의 신유강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명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만경강변 백구평야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신유강길에서 만경강 북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 익산시 춘포면의 춘포리이다. 봄이면 제방에 늘어선 벚꽃이 강변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

26) 쌍칠길

김제시와 접경에 있는 도도동의 쌍칠길은 옛부터 사용하던 마을이름을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마산천 제방변에 있는 쌍칠길은 백구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27) 도도길
28) 만경강남로
- 기점 : 화전동 969-1
- 종점 : 강흥동 553-2

만경강로는 만경강 일대임을 반영하여 명칭으로 부여하였다.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밤샘에서 발원하여 김제시 진봉면의 심포로 들어가는 만경강의 본류는 고산천이다. 이 물줄기가 전주시 호성동 부근에서 소양천을 만난 후, 다시 전주천을 만나 만경강으로 거듭나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서 서해바다로 들어가는 84Km의 강이다. 원래는 강의 길이가 98km였는데 일제 때 사행천을 직선화하면서 지금은 84km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나라 안에서 가장 넓은 평야인 호남평야의 주요 수원이 되는 강이다.

고산천과 소양천이 만나 한내를 이루고 만경강으로 흘러가는 그 한내에는 완산승경의 하나인 대천파설이 있었다. 한여름에 눈빛같이 시원하게 부서져 내리는 물결과 가을 달밤에 갈대꽃이 핀 모래벌에 사뿐히 내려앉는 기러기 떼가 그것이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강 뚝의 머리바위에 있던 비비정에 올라 굽어 내려다보면 배꽃 같이 날려 천 쪽 만 쪽 부서져 내리던 달빛의 정경은 말할 수도 없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저녁이면 모랫벌을 끼고 고기잡이 불을 밝힌 채 게를 잡던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시켰다는데 이미 그것은 옛 일이다.

맛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해서 참게다리 하나면 고봉밥을 비웠다던 참게도 사라지고 천렵꾼들도 이미 발길을 끊어버린 만경강의 물줄기는 실핏줄처럼 흘러 만경강이 되어 서해로 합류한다. 그 만경강을 따라 전주시 화전동. 오덕동. 강흥동으로 이어진 길이 만경강 남로이다.

또한 이곳은 서울에서 제주로 가는 조선 시대 9대로 중 삼남대로가 지나는 길목이었다.

꽃이 많은 동네로 유명한 화전마을은 만경강 건너편에 세워져 있는 비비정(飛飛亭)과, 그리고 삼례읍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삼례교, 만경강을 가로 건너는 삼례철교 등이 주변에 둘러 있어서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화전동의 원화전 마을에는 옛날에 ‘대천주막’이라는 큰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옛 제도에 따르면 조정은 공무 여행자들의 숙식을 위하여 주요 도로를 따라 원(院)을 세웠다. 그러나 원의 대부분이 왜란과 호란 후에 문을 닫았다. 원은 주막(酒幕)이나 주점(酒店)으로 바뀌었으며, 주점 중에는 과거의 원 이름을 가졌거나 비슷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많다”고 하였다. 지금은 사라진 옛 주막거리에다 주막을 복원하여 주모도 공채로 뽑고 방에 불을 때는 방우도 공채를 한다면 새로운 관광 상품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또한 이곳에는 마방(馬房)이 있어서 이곳을 지나던 수많은 소장수들이 이용했다고 한다. 원화전 마을 남쪽의 반월동에도 조산원(兆山院)이 있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장이 섰다고 하는데 그곳 역시 아무런 자취도 없다.

조선시대에는 원화전 마을과 그 건너편인 비비정(飛飛亭) 아래까지 서해의 바닷물이 들어와 소금을 실은 배들이 출입했다고 하는데, 익산 근처의 목천포 다리 부근에 제수문이 만들어지면서 바닷물의 유입이 끊어져 뱃길 또한 사라졌다. 지금은 이 강으로 흘러 들어오는 수많은 지류가 오염되어 있어 심각한 환경오염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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